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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습과 구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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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3년 전 그 가게를 찾았을 때 두 가지에 놀랐다. 비좁고 노후화된 시설에 놀랐고, 1시간 넘게 군소리 없이 줄 서서 기다리는 손님들의 인내심에 놀랐다. 주방에선 루미 할머니가 사누키 우동 특유의 미끈미끈하고 쫄깃한 면을 뽑는 기술을 전수하고 있었다. 홋카이도(北海道)·히로시마(廣島) 등에서 모여든 ‘제자’만도 10명이 넘는다고 했다. 아들이 없고, 딸도 모두 출가한 루미 할머니는 이들을 경쟁시켰다. 후계자를 키우기 위해서다. 그런데 얼마 전 TV에 루미 할머니가 출연, “이 청년이 내 후계자”라고 소개하는 장면이 나왔다. 당연히 당시 제자 중의 한 명이거니 했다. 그런데 웬걸. 최근 샐러리맨을 그만 둔 ‘왕초보’ 외손자(26)란다. 일본 사회의 뿌리 깊은 세습 문화에 또 한번 놀랐다. 따지고 보면 우동 가게건 기업이건 맛이 떨어지거나 경영을 소홀히 하면 가차없는 세상이다. 세습이라 해서 한통속으로 손가락질하긴 좀 그렇다.

하지만 제3자의 입장에서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세습의 세계가 있다. 일본의 정치판이다. 1990년 이후 지금까지 일본의 총리 자리에 올랐던 12명 중 10명이 세습 의원이었다. 이 중 6명은 아직까지도 현역 의원으로 버젓이 버티고 있다. 총리를 지냈다고 해서 바로 은퇴하는 법이 없다. 명분이야 ‘정치 원로’로서 국가운영에 이바지한다는 것이지만 정작 속사정은 다른 데 있다. 자식에게 자신의 지역구를 물려주기 위한 최적의 시기를 찾기 위해 ‘뜸’을 들이는 기간이다. 집권 자민당의 중의원 의원 303명 중 세습 의원은 107명으로, 3분의 1이 넘는다. 이들은 ‘지방(地盤·후원회 조직)’ ‘간방(看板·지명도)’ ‘가방(선거자금)’의, 이른바 ‘3방’을 그대로 이어받는다. 정치자금도 세금 없이 상속된다. 땅 짚고 헤엄치기다. 같은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는 영국의 경우 원칙적으로 세습 공천은 없다. 세습 후보를 공천하더라도 가장 강적이 버티고 있는 지역구에 일부러 공천해 바닥에서부터 기어오르게 만든다.

선거가 임박한 일본에서 요즘 ‘세습 제한론’이 대두하고 있다. 하지만 대표적 세습 정치가인 아소 다로(麻生太郞) 총리부터 “세습 의원이라 해서 나쁘다는 증거 있나”라고 나오니 논의가 진전될 리 만무하다. 그러니 ‘새로운 피’다 ‘헝그리 정신’ 같은 게 있을 수 없다. 세습 정치는 곧 ‘늙은 나라 일본’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이 마냥 일본 정치 흉을 볼 처지도 아니다. 정치인들이 세습을 안 할지 몰라도 전직 대통령이 5년에 한 번씩 의무방어전 치르듯 홍역을 치르고, 가끔 감옥에도 가는 ‘구습’이자 ‘악습’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보면 이것이 더 후진적이다.

김현기 도쿄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