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국백경]3.능정마을 사람들…살림 걱정에도 순박한 인심 여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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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전국적으로 많은 눈이 내려 피해가 속출한다는 보도가 전파를 타고 전해지는 이곳 한반도의 남쪽 끝, 전남 고흥군 영남면 금사리 갯벌가에 자리잡은 능정마을에는 봄이라도 재촉하듯 하루 종일 비가 내리고 있었다.

지형적인 특성으로 한 겨울에도 눈을 볼 수 없는 오지 중의 오지 능정마을은 지역발전과 개발이 전무해 92가구 4백여명의 주민들이 예나 지금이나 봄에는 씨 뿌려 농사짓고 겨울에는 굴 양식과 파래 채취로 순박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비라도 내리는 날에는 마을 사람들은 모처럼 바쁜 일손을 멈추고 마을 이장 집에 모여 앉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주머니에 돈이 얼마나 있는지도 모르고 나라살림을 해왔다니 말이나 되나.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4대째 이 마을에서 살면서 지난 20년간 굴 양식을 해왔다는 정단오 (58) 씨는 모든 것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언성을 높여 말을 내뱉는다.

요즘 들어 주문이 절반으로 줄어든데다 가격도 떨어지고 보니 도무지 일할 맛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러 단계의 유통구조며, 의료보험, 불합리한 추곡 수매가격에 이르기까지 마을 사람들의 불만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근본적인 농촌문제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다시 경제위기 현안에 초점이 맞춰진다.

“농촌 사람들은 항상 허리띠를 졸라매고 살아왔습니다.

우리들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어요.” 오이와 방울토마토 농사를 짓고 부업으로 파래를 따서 살아간다는 강정목 (46) 씨. 지금 이 나라가 이만큼 살게 된 것도 농어촌 주민들이 열심히 살아왔기 때문이라는 데는 주민 모두가 입을 모은다.

“나라 살림이 어렵다니 우리들이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는 없지요.” 비장한 각오라도 한 듯 말을 꺼내는 마을 이장 김광수 (47) 씨는 “시골인심이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같이 웃어주고, 같이 슬퍼하며, 필요한 때 발 벗고 나서서 같이 땀흘려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같이 살아가는 것이지요” 라며 주민들이 난방비를 줄이기 위해 부모와 자식들이 한방에서 잠을 자고, 전기를 절약하기 위해 등 하나를 덜 밝힌다고 말한다.

넉넉치 못한 농촌살림에 무슨 금붙이들이 있겠냐만은 애들 돌반지라도 찾아 금 모으기 운동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자손에게 물려줄 것이라야 그들이 버겁게 살아온 이 삶의 터전뿐이라고 생각하는 순박한 사람들, 그래서 쓰레기 한 봉지를 버려도 다시 한번 생각하며 환경이야말로 그들의 생계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니 환경파괴는 곧 그들의 삶의 터전을 잃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다.

따사로운 겨울 햇살이 호수처럼 잔잔한 마을 포구의 물안개를 서서히 거두어 들이는 이른 아침, 마을 사람들은 무공해 자연 건강식품으로 으뜸이라는 파래 채취 작업에 나서느라 부산스럽다.

오후가 되어 파래를 가득 실은 조각배들이 다시 몰려들기 시작하고 포구는 잠시나마 활기를 띤다.

작별인사를 고하는 필자에게 1남 2녀를 둔 강정목씨가 다가와 말한다.

“우리 같이 힘냅시다.

시골사람들은 IMF 전부터 절약하며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그것이 기본이니까요. 지도자 되시는 분들이 조금만 솔선수범하면 우리들은 박수치며 끝까지 따라갑니다.

우리 자식들에게 엄청난 빚을 유산으로 남겨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사진·글=김희중〈에드워드 김〉

〈김희중은…〉

1940년 서울 태생. 경기고 재학 시절 두 번의 사진전을 열어 주목을 받았다.

미국 텍사스 주립대학과 미주리 신문방송대학원을 거쳐 67년 내셔널지오그래픽사에 입사, 사진편집장을 지냈다.

73년 서방기자로선 최초로 북한을 취재, 미국 최우수 사진상.취재상.편집상 등을 수상. 현재 HEK홍보기획공사 대표이며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 객원교수로 출강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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