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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 문화혁명]2.도도한 올터너티브(1)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미국 뉴욕 다운타운인 맨해튼 소호 지역에 자리잡은 CBGB (Country.Blue Grass.Blues) 클럽은 겉모습부터 대놓고 기성의 가치관을 거부한다.

지저분한 벽면과 상.하수도관이 어지럽게 드러나 있는 천장, 그리고 어두운 조명. 그 속에 2평 남짓한 무대와 8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좁은 공간이 열려 있다.

지난 12월의 한 일요일 저녁. 무명의 펑크록 밴드가 전자기타.드럼 소리를 쏟아낸다.

무대 밑 좁은 공간에는 관중들이 한데 뒤엉켜 광란에 가까운 춤을 춘다. 앉아서 감상하는 사람들 쪽으로 잠시 눈을 돌려보니 놀랍게도 새로 나온 LP앨범을 손에 든 60대 노인부터 정장을 한 중년까지 다양하기 이를 데 없다.

바로 맨해튼을 대표하는 올터너티브 클럽의 모습이다.

내친 김에 맨해튼을 조금 더 돌아보자. 같은 시기 맨해튼 남쪽 월스트리트근처의 트라이베카 지역에 위치한 '니팅 팩토리 (Knitting Factory)' 의 토요일 저녁 풍경. 80여 명이 들어설 수 있는 공연장에서는 흑인 재즈그룹 '더 라스트 포이츠 (The Last Poets)' 의 전위적인 봉고 소리가 관중들을 압도하고 있다.

어두운 데다 의자조차 없이 서서 들어야 하는 불편한 전위음악 클럽이다.

그런데도 관객들의 대부분은 정장차림의 신사숙녀다.

지저분하고 산만한 이런 언더그라운드 클럽의 겉모습만 보면 그야말로 저급문화의 현장, 도시의 문화 배설구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 이런 곳이 이제 신선한 문화가 꿈틀거리는 창조의 산실로 각광받고 있다.

25년 전 문을 연 CBGB는 '아름다움만 표현하는 지루한 메인 스트림 음악' 을 거부하고 '나를 표현하는 올터너티브' 를 추구한 펑크록이 탄생한 곳이다.

지난 87년 문을 연 니팅 팩토리는 '노이즈 재즈' 라는 자유로운 형태의 음악을 추구한 것으로 유명하다.

뉴욕타임스의 표현을 빌리면 '뉴욕시 음악사의 한 부분' 으로 자리매김했을 정도. 이 클럽의 스태프인 수전 크래틴의 소개말은 이렇다.

"획일화된 대량상업음악이 아닌, 진정한 나와 우리의 즐거움을 추구하며 다양성과 개성을 중시하는 올터너티브 음악의 전당이다."

이들 '바닥문화' 는 이제 세계시장을 향해 방향을 틀고 있다.

음악을 통해 기득권층을 저주하고 분노를 폭발시키고 싶은 소외층 젊은이들이 기수격이다.

여기에 규격화된 주류음악계에 식상한 지식인까지 언더그라운드 클럽의 신선한 문화에 빠져들고 있다는 사실. 말 그대로 올터너티브 (alternative) 는 주류 (主流)에 대한 '대안 (代案)' 으로 충분해 보인다.

보수성향이 강한 미국의 그래미상 (賞) 도 90년대 들어 비주류인 올터너티브.랩을 별도 수상부문으로 추가한 점은 무얼 의미하는 걸까. 올해의 경우 영국 출신 록밴드 '라디오 헤드' , 공격적인 노래가사로 사회를 비판해온 여성 포크가수 아니 디 프랑코, 펑크록커인 패티 스미스 등 비주류 음악인이 대거 노미네이트돼 있다.

또 비주류 정신으로 산업사회의 소외현상을 격렬하게 비판해온 '나인 인치 네일스' '케미컬 브러더스' 등 인더스트리얼계 록그룹과 좌파 하드코어 록그룹인 '레이지 어게인스트 머신' 등도 이 수상 대열에서 예외는 아니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 은 지난해 '나인 인치 네일스' 의 트렌트 레즈너를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25인' 에 올려놓았으니까. 잠시 눈을 가까운 일본으로 돌려보자. 이달 초 큐슈 구마모토시 (市) 의 'NHK 구마모토 FM' 의 생방송 스튜디오. 이상은.김광석.어어부밴드의 노래를 해설과 함께 연이어 틀어댄다.

해설자는 '크로스비트 아시아' 라는 동아시아 비주류문화 교류단체의 회장 카와카미 치오리. 크로스비트 아시아는 비주류 대중음악을 통해 동아시아 문화교류를 추구하려는 취지의 단체다.

지난 해 9월 잊혀진 60년대 저항가수 한대수를 초청, 일본의 언더그라운드 뮤지션 카르멘 마키와 가진 후쿠오카 합동공연이 대표적인 이벤트다.

지난해 7월 재일한국인과 일본인의 연합그룹 '도쿄 비빔밥 클럽' 과 한국의 강산에.임지훈 등이 출연한 쓰시마섬 '제2회 친구음악제' 도 같은 맥락. 95년 첫선을 보인 이 행사는 한일 비주류 음악인들의 정기공연으로 자리를 잡을 조짐이다.

정보화사회 하에서 비주류 문화도 주류 못지않은 자신들만의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카와카미 회장은 "비주류 음악의 세계에서는 개성과 창의력이 중요할 뿐 국적은 무의미하다.

그런 점에서 비주류 음악은 글로벌화한 미래문화에 큰 영향을 줄 것" 이라고 포부를 밝힌다.

이 번엔 '등잔 밑의' 서울 홍대 앞에 있는 클럽 '드럭' 의 지난 주말. 온통 낙서.벽보 투성이인 이 곳엔 찢어지는 듯한 전자 펑크음악만 가득하다.

노랗게 염색한 머리를 하늘 위로 삐죽하게 세운 리더가 '배고파' 를 연신 외친다.

4인조 펑크밴드 '노브레인' 의 공연이다.

이어 3인조 '위퍼' 의 등장. 언더그라운드 밴드인 이들이 자신의 연주를 스스로 녹음한 테이프를 5천~7천원을 받고 공연장에서 판 지는 벌써 오래다.

그러다 5백만원 정도의 저예산으로 '크라잉 너트' '옐로우 키친' 이 공동으로 정식음반 '아워 네이션' 을 낸 것은 재작년 10월. 그런데 예기치 않았던 이변이라 해야 할지. 알음알음으로 팔린 음반이 무려 1만 장을 넘은 것이다.

지난 주말 선보인 '노 브레인' '위퍼' 공동의 '아워 네이션' 2집에 대한 기대감도 만만치 않다.

대기업인 금강기획의 '멀티플렉스' 가 이 음반의 배급을 맡겠다고 나선 것부터 그렇다.

자유로운 비주류 음악이 댄스곡만 나오는 방송사 음악프로그램의 모습을 변화시킬 것 같은 예감이다.

홍대 앞에는 이런 언더그라운드 밴드가 무려 2백 개나 활동 중이라면 쉽게 믿을 수 있을까. 그 중에서 벌써 기존 대중음악계를 흔들고 있는 스타급 그룹 자우림. 홍대앞 언더그라운드 밴드 출신으로 MBC프로덕션이 만든 황인뢰 감독의 영화 '꽃을 든 남자' 의 삽입곡 '헤이헤이헤이' 를 만들고 부른 주인공들이다.

지난해 MBC의 인기가요 순위 프로그램에서 2위까지 올랐고 전국노래자랑에서도 젊은 참가자들이 즐겨 선택하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2000년대 초반 세계 음악관련 시장은 3조달러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이다.

우리 국민 총생산 (GNP) 의 5배가 넘는 금액이다.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시장에 자리잡기 위해서는 단선적인 주류문화를 뛰어넘는 다양성과 개성있는 에너지가 동시에 필요하다.

게다가 언더그라운드 문화가 갖는 철저한 창조정신과 치열한 자기표현력은 21세기 문화산업의 중요한 자양분으로 작용할 터. 비주류에서 주류 이상의 것을 건져 올리는 작업에 뛰어들기는 아직 늦지 않다.

뉴욕.서울 = 김상도.채인택.문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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