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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경제망친 인도네시아 사태 현장진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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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환율급등에 따른 기업도산과 금융기관의 대외채무 부담 급증은 인도네시아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위기의 심각성은 그 배경이 단순히 경제문제가 아니라는 데 있다.

인도네시아 경제는 연간 7%를 웃도는 성장률에다 국내총생산 (GDP) 대비 경상수지 적자가 3.4%에 불과해 태국 (8.2%) 이나 말레이시아 (6%).필리핀 (4.2%) 보다 기초 체력이 훨씬 좋은 편이다.

문제는 국가통합의 위기와 국제시장의 신뢰 붕괴다.

일본 다이와 (大和) 총합연구소는 "인도네시아는 루피아화를 사용하는 저소득층 2억명과 달러화를 사용하는 수도 자카르타 중심의 고소득층 1천만명으로 뚜렷하게 나뉘는 사실상의 1국가 2체제" 라고 분석했다.

달러권 (圈) 사회는 ▶수하르토 대통령의 친인척 ▶군.경찰 ▶화교계 기업 ▶테크노크라트 (외국유학 경험을 가진 실무 경제관료) 의 4대 세력으로 구성돼 있다.

인도네시아 고급 정보를 가장 가까이 접하는 싱가포르 외환시장 관계자들은 올들어 루피아화 가치가 말레이시아 링깃이나 필리핀의 페소보다 심각하게 폭락하는 배경으로 달러권 사회의 분열을 손꼽고 있다.

오는 3월 대통령선거를 둘러싸고 4개 세력간에 정치적 갈등이 고조되고 경제를 장악하고 있는 화교계가 싱가포르.홍콩으로 자본을 유출시키면서 걷잡을 수 없이 위기를 악화시켰다는 지적이다.

수하르토 대통령이 IMF의 권고를 무시한 채 확대 예산 편성으로 벼랑끝 대치를 벌인 것도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다.

석유 등 풍부한 천연자원을 배경으로 한 자신감도 작용한데다 선거를 앞두고 2억명의 거대한 루피아권 표밭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76세의 고령에 중병을 앓고 있는 수하르토의 인기가 곤두박질치면서 군부 쿠데타설이 끈질기게 나돌고 있는 것은 권위주의체제 국가에서 국민적 저항감을 표현하는 한 형식에 다름 아니다.

또 국가정책 결정과정의 투명성이 의심받다 보니 IMF 권고를 무시한 긴급 경제안정책의 발동 가능성까지 부상하는 실정이다.

빌 클린턴 미 대통령과 수하르토 대통령의 전화통화를 계기로 인도네시아의 국가부도 위기는 어느 정도 진정된 것 같다.

루피아화는 달러당 1만1천루피아까지 떨어졌다가 7천루피아까지 급반등해 현재로선 임시 봉합 (縫合)에 성공했다는 것이 현지 언론들의 평가다.

그러나 루피아화의 운명은 수하르토 대통령의 정국운영 방향과 향후 5년간 2인자가 될 차기 부통령 후보에 달려 있다.

국제 금융시장은 IMF개혁안의 전폭적인 수용과 함께 믿을만한 실력자로부터 더 확실한 약속을 받아내는 것이 사태해결을 위한 첫번째 단계라고 보고 있다.

자카르타 = 이철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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