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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이공계] 1. KAIST 학생 33% "진로 바꾸고 싶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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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학생 1인당 올해 실험.실습비-8년 전보다 1만원 깎인 16만7000원'.

대한민국 '이공계 1번지'로 불리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현주소를 보여 주는 단면이다. 컴퓨터만 해도 8년 전 펜티엄급(MHz)에서 올해는 펜티엄4급(GHz)으로 연산속도가 30배나 빨라질 정도로 과학기술 환경이 급속히 바뀌는데도, 국내 최고 과학 인재들의 실습 여건은 오히려 뒷걸음질친 셈이다. 이 대학의 올해 예산은 2342억원으로 지난해보다 319억원이 줄었다.

SBS 인기드라마 '카이스트'의 소재가 되기도 했던 KAIST는 1971년 미국 MIT와 같은 '세계 초일류 대학'을 목표로 설립된 과학기술부 산하 국책 연구.교육기관이다. KAIST 관계자는 "실험.실습비 등이 턱없이 모자라 정부에 이공계 발전 차원에서 예산을 늘려 달라고 애원할 정도"라며 "이런 처지에서 초일류 대학 목표란 연료가 부족한 우주 로켓과 같은 것"이라고 호소했다.

이와 관련, 과기부 최석식 기획관리실장은 "KAIST가 예산을 더 배정받을 만큼 설득력이 부족해 그렇게 된 것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정부는 연구개발 투자가 국내총생산(GDP) 대비로는 유럽 등 선진국 수준이 됐다고 자랑하지만 '이공계 위기론'의 목소리는 왜 날로 더 커지는 걸까.

중앙일보와 KAIST는 지난 3월 초 특별취재팀과 연구팀을 구성해 넉달간 KAIST를 모델로 공동 연구.취재를 했다. 이 과정에서 ▶KAIST 교수 173명과 학생 1346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전국 고교 688개에 대한 설문조사 ▶세 차례에 걸친 토론회 등을 했다.

KAIST 조사에서 교수.학생들은 ▶우리나라의 전반적인 이공계 교육이 부실하고 ▶이공계 출신이 푸대접을 받고 있으며 ▶학생들은 불투명한 진로와 비전 때문에 고민이 많고 ▶이로 인해 인도.중국 등 경쟁국에 뒤처지게 될 것이라고 응답했다.

특히 KAIST 학생의 32.5%가 이공계 위기감 등의 영향으로 다른 분야(의대 등)로 진로를 바꿀 의사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교수들도 '더 좋은 조건이 있다면'이라는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적지 않은 비율(43.4%)로 '몸 담은 대학을 떠날 의사가 있다'는 속내를 드러냈다.

공동연구에 참여한 경종민 교수는 이공계 위기의 본질을 '양 과잉, 질 하락'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대학마다 뽑기는 많이 뽑는데 사회적인 홀대 등으로 정작 우수 학생들의 이공계 기피 현상은 심해지면서 질이 떨어진 것이 문제라는 설명이다.

설문에서도 대부분 교수(86.7%)와 학생(69.7%)이 "이공계 자원의 질이 과거보다 떨어졌다"고 응답했다. KAIST의 경우 2000년에 2.57 대 1이었던 신입생 모집 경쟁률이 지난해엔 1.65 대 1로 낮아졌다. 98년 이후 2 대 1 밑으로 내려간 것은 처음이다.

또 전국 688개 고교 대상 조사에선 올 초 이과 수석 졸업생의 33%가 의.약학 계열에 진학한 것으로 나타났다. 법대 등 인문계에도 13%나 갔다. 수석 졸업생 중 순수 이공계에 진학한 비율은 51%였다. 국내 대학의 모집정원 중 의.약학계가 전체 이과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5%에 불과하다.

미국.유럽.일본 등의 경우 최우수학생 중 1% 정도가 의.약학 계열을 선호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나라 우수학생들의 '의.약학계 쏠림 현상'은 더 두드러진다. 한편 우리나라의 공대 졸업생수는 미국과 맞먹는 연간 6만7000명으로 독일.프랑스.영국 등에 비해 두배 가까이 많다.

전문가들은 이공계 문제 해결을 위해선 무엇보다 '하향평준화'를 막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홍창선 전 KAIST 총장은 "이공계는 빌 게이츠와 같이 똑똑한 한명이 국가의 산업과 부(富)를 키우는 특성이 있다"며 "균형발전 논리를 앞세워 전국의 이공계 대학에 자원을 똑같이 나눠주기보다는 선택과 집중 정책으로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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