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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엔 ‘핵과 인질’, 남한엔 ‘개성공단과 인질’ 카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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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호 03면

이명박 대통령이 25일 오전 청와대를 예방한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을 악수로 맞이하고 있다. 이 대통령은 “북한을 통한 러시아 천연가스 도입 프로젝트가 성사되면 북한은 상당액을 얻게 되고 이는 북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오종택 기자

북한판 ‘막장 외교’가 재연됐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25일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폐연료봉 재처리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5일 북한의 로켓 발사 이후 지속되는 국제 사회의 압박에 대한 반발이다. 한반도 위기를 최대한 고조시키며 막다른 골목으로 치달을 것임을 예고한다. 정부 당국자들 사이에선 “북한의 과거 패턴으로 볼 때 2차 핵실험 카드까지 쓸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들이 나온다. 협상 테이블에 앉더라도, 먼저 벼랑 끝까지 상황을 몰아 몸값을 최대로 높이겠다는 행태를 이번에도 반복할 것이란 예측이다.

재연되는 북한 ‘막장외교’

러 외무장관, 김정일 못 만나
북한은 14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로켓 발사를 규탄하는 의장 성명을 내자 나름의 맞대응 로드맵을 제시했다. 외무성 성명이 그것이다. 성명은 “6자회담에 다시는 절대로 참여하지 않겠다. 어떤 합의에도 구속되지 않을 것이며, 핵시설을 재가동하고 폐연료봉을 깨끗이 재처리하겠다”고 했다.

그다음 영변에 머물던 국제원자력기구(IAEA) 감시요원과 미국 관리들을 추방했다. 핵시설의 봉인도 해제하고 감시 카메라도 철거했다. 폐연료봉 재처리 사실은 24일 유엔 안보리 제재위원회가 북한 기업 3곳을 제재 대상 기업으로 선정한 직후 발표했다.
안보리 의장성명에 화가 나 있으며 하나씩 ‘벌’을 주겠다는 의도도 비치고 있다.

두만강 유역에서 국경을 넘은 혐의로 억류된 미 국적 여기자 2명에 대해 북한은 간접적으로 미국에 신변 안전을 확인해주며 ‘호의적’으로 나왔었다. 그러나 안보리 의장성명이 나오고, 23일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상원 외교관계위원회에서 “오락가락하고 변덕스러운 북한에 끌려다니지 않겠다”고 말하자 “두 여기자를 정식 재판에 회부한다”고 밝혔다. 미측의 여기자 관련 대화 요구에 북측은 무응답이라고 한다.

지난 21일 개성 남북 접촉도 같은 맥락이다. 북한은 남측에 일방적으로 전달한 통지문에서 특혜 조치를 재협상하려는 배경으로 안보리 의장성명을 꼽았다. 통지문은 “남한 정부가 장거리 로켓 발사를 악의에 차서 걸고 들다 못해 국제적인 제재 놀음에 앞장섰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의장 성명이 나온 이후 북한이 전방위 강공책을 쓰고 있다”며 “오바마 행정부엔 비핵화 역주행으로, 남측엔 개성공단 카드로 압박하고 있다”고 했다.

중국·러시아에도 마찬가지다. 중국과 러시아는 안보리 차원의 대북 제재는 반대했지만, 결국 의장성명은 신속하게 찬성했다. 그러자 북한은 의장성명을 “미국을 추종하는 자들의 대북 선전포고”로 규정했다. 중·러가 한국·일본과 함께 추종 세력이 된 셈이다.

23~24일 평양을 방문한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지 못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러시아 외무장관의 평양 방문 때, 북한 최고 지도자를 면담하는 것은 관례였다. 1990년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옛 소련 외무장관이 한·소 수교 방침을 통보하러 갔다가 김일성 주석으로부터 면담을 거부당한 이후 처음이다. 라브로프 장관은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의 친서도 휴대하고 있었다. 라브로프 장관은 25일 이명박 대통령을 예방한 자리에서 “러시아가 북한 위성을 대신 발사해 주는 방안을 제안했으나 북한은 ‘우리도 나름대로 할 수 있다’며 거절했다”고 전했다.

박의춘 북한 외무상은 비동맹운동(NAM) 조정위원회 장관급회의 참석차 쿠바를 방문하는 길에 25일 베이징에 들러 중국 고위 관리들을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소식통은 “현재 북·중 분위기도 서먹서먹하다”며 6자회담 재개 등 희망적 메시지보다 안보리 성명에 대한 항의, 북한의 핵재처리 결정 등을 설명하는 자리였을 것으로 봤다.

조선신보 “위성 한 발로 외교 주도권 쥐어”
“북한의 협박에 굴복하지 않겠다” “북한은 대가를 지불할 것이다”라고 한 미국 고위 관리는 힐러리 장관만이 아니다. 92년 북·미 핵 협상이 시작된 뒤 북한이 위협하고 도발할 때마다 미 고위 관리들이 한 말이다.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극단적 언어와 위협 일색의 북한식 외교 수사(rhetoric)를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 부시 행정부도 결국 나쁜 행동에 보상하는 패턴을 따랐다.

북한의 ‘벼랑 끝 외교’는 93년부터 성과를 거둬왔다.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이후 한반도 전쟁 위기까지 치달았지만, 결국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했고 94년 제네바 핵협정으로 이어졌다.

98년 8월 대포동 1호 미사일 발사 때도 그랬다. 2006년 7월 대포동 2호 미사일 발사 뒤 핵실험까지 강행하며 위기지수를 최대로 끌어당겨 부시 정부의 대북 정책 전환을 이끌어냈다.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도 25일 “한 발의 인공위성 발사로 조선(북한)은 외교의 주도권을 쥐었다”고 자평했다.

이런 벼랑 끝 외교의 ‘성과’ 때문에 “북한이 외교 하나는 잘한다”고 평하는 이들도 있다. 인구 2300만, 이란·이라크와 달리 석유도 없고 제대로 된 통계조차 나오지 않는 나라가 초강대국 미국을 흔들어 결국 기름과 식량, 현금을 얻어낸다는 것이다. ‘국제사회의 불량배’란 이미지와 북한 주민들의 희생을 고려 항목에서 제외했을 때나 가능한 평가다.

2008년 8월 뉴스위크는 “어쨌든, 북한은 얇게 썰어 한 장씩 먹는 이탈리아 소시지 살라미처럼 이슈를 잘라내 이익을 극대화하는 살라미 전술과, 벼랑 끝 전술로 ‘되로 주고 말로 받는 불패의 협상력’을 구축했다”고 평가했다.

80년대부터 남북 협상에 참가했던 한 인사는 “북한외교는 일종의 막장 외교”라고 했다. 의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공화국의 위신과 명분을 얘기하면서도 현금이나 현물을 얻는 데는 ‘후안무치’하다”며 2001년 남북 임진강 수해방지 협상을 한 예로 들었다.

그는 “북측 수계를 공동조사키로 했는데, 실무회담 때 만났더니 북한은 근본 원인 해결을 위해 필요하다며 묘목 수십만 그루를 요구했고, 거기에 묘목원 조성과 공동조사단이 타고 다닐 트럭·기름·식량 등을 만날 때마다 한 가지씩 달라고 했다”고 혀를 찼다. 이번 개성공단 임금 재협상 요구도 ‘돈도 챙기며 남한 정부도 딜레마에 빠뜨리는’ 다목적 패로 보인다.

정부 일각에선 ‘북한이 개성공단을 고리로, 경색됐던 남북 관계를 개선하려 할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을 걸고 있다. 반면 ‘북한이 남한을 길들이고 공단을 폐쇄하려는 수순을 밟는다’고 보는 시각도 만만찮다. 청와대 관계자는 “대체적인 강공 분위기에서 남북 관계를 쉽게 열려 하지 않을 것이란 점은 염두에 두고 있다”면서 “원칙은 지키면서,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억류된 미국 여기자 문제 해법이 상황 변화의 매개가 될 것이란 기대도 나온다. 빌 리처드슨 뉴멕시코 주지사나, 스티븐 보즈워스 미 대북 특별대표가 석방 협상을 위해 특사로 방북할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특사 방문을 계기로 대화 전환을 모색하면 상황은 급반전될 수 있다. 조선신보는 25일 클린턴 행정부 시절의 협상을 거론하며 대미 대화 의지를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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