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배 칼럼]국가경쟁력이 문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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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미국이 한창 일본의 경제력에 밀리고 있었던 1985년 레이건 대통령의 한 자문위원회는 미국의 경쟁력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휴렛팩커드의 존 영 사장을 위원장으로 한 이 위원회가 낸 '전지구적 경쟁 : 새로운 현실' 이란 이 보고서는 낙후된 미국산업의 경쟁력을 회복하기 위해 하이테크 부문의 집중투자를 권고하고 있다.

그런데 이 보고서의 밑바탕에 흐르는 가장 중요한 사항은 정부와 기업, 특히 민간부문의 활성화였다.

정부는 명확한 산업정책을 제시할 것, 민간부문의 투자 촉진을 위해 세제를 대폭 고치고 규제를 완화할 것 등이 그 골자였다.

정부의 직접 개입론이 우세하던 그 시절 그 제안은 곧바로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레이건.부시 두 공화당 정부가 철저히 무시해버린 이 제안을 되살려낸 것이 클린턴 민주당 정부였다.

이 권고들은 거의 그대로 실현됐고 미국은 최근 정보산업을 중심으로 호황을 구가하고 있다.

비전의 제시, 법과 제도를 마련하는 책임은 정부에, 실물경제는 민간부문의 책임아래 이뤄지도록 한 것이 성공의 요체였다.

IMF체제를 극복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내핍과 수출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이론이 없다.

그것을 어떻게 이뤄내느냐는 문제를 두고 최근 위험스런 생각들이 다시 떠오르고 있는 것 같다.

구조조정의 책임을 떠안은 정부의 역할과 권한에 대해 혼동이 생기고 있는 것이다.

국가의 경쟁력은 마이클 포터 교수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핵심기업들의 경쟁력이다.

IMF체제 아래에서도 이 경쟁력을 크게 훼손하지 않고 끌고나가 우리가 직면한 난관을 돌파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일 게다.

지금까지 우리 기업들의 거품이라는 것을 따져보면 급성장에 따른 과속팽창과 정경유착에 의한 경제외적 요인으로 인해 부풀려지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것이 문어발식 확장을 가능케 했고, 부채비율 1천%, 심지어 1만%라는 거품기업을 가능케 하는 요인이었다.

그 거품을 걷어내고 냉혹한 국제시장에서 살아 남으려면 경쟁의 원리가 엄격하고 공정하게 적용되도록 하는 것 이외에 다른 수단이 있을 수 없다.

은행이 자기 책임아래 돈을 빌려주고, 기업은 자체기술력으로 생산.판매하고, 그것이 안돼 기업이 망하게 되면 함께 책임지는 것이다.

그것을 정부가 나서서 교통정리를 하려 들면 또다시 관치금융과 정경유착이 되살아나고 구조조정은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말 것이다.

5년전 이맘때 수많은 기업들이 YS당선자에게 줄을 섰다.

YS의 가신들과 인척들은 그것을 빙자해 기업들에 접근했고 많은 잡음들이 들렸다.

지금도 그런 환상을 버리지 못하고 당선자와 그 측근 가신들의 주변을 맴도는 기업인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누구의 병실은 인산인해 (人山人海) 라더라, 아무개의 집엔 신년 하례객으로 넘쳤다더라는 소문이 나도는 것들을 두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들 역시 개혁 운운할 자격이 없는 구정치인들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나오고 있다.

정권인수위의 행태나 경제청문회 조기 개최 주장들이 그런 우려를 더 키우고 있는 것이다.

정권인수위의 임무는 전 정권이 해온 일들을 사무적으로 인계받고, 현황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다.

전 정권의 비리나 잘못은 정권 출범후 책임을 가리면 된다.

그런데 어쩌면 상부의 지시대로 했을 관료들을 마치 점령군이 죄인 다루듯 한다면 그것은 평화적 정권교체가 아니라 그야말로 '적대적 (敵對的)' 정권접수가 되고 말 것이다.

최근에 일고 있는 실정 (失政) 책임 규명론이나 문책론 등이 여론재판식으로 번져가는 것도 역시 사회적 통합을 저해하는 요소로 경계해야 한다.

노.사.정 합의가 어느 한쪽의 일방적 희생을 전제해서는 이뤄질 수 없다.

지금 당면하고 있는 최우선의 국가적 과제는 IMF체제의 조기졸업이다.

물론 무능한 정부와 방만한 경영을 해온 재벌들의 책임을 물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IMF 일격에 휘청거리는 한국의 국가적 경쟁력을 깡그리 무너뜨리는 방향으로 진행된다면 웃을 사람들은 바다 건너에나 있을 뿐이다.

정부는 대기업의 구조조정과 공정한 경쟁을 위한 제도와 법규를 제정.정비하는 역할을, 기업은 그들의 자체노력으로 홀로서기를 하는 역할을 각각 감당한다는 인식을 갖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다.

김영배<뉴미디어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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