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 세상보기]알아듣고 미리 아는 98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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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호랑이는 과연 영물 (靈物) 일까. 호랑이는 한국인의 조상 자리를 놓고 곰과 겨루다 패배했다.

겨루기 종목은 참을성. 마늘의 매운 맛을 견디지 못하고 진 것이다 (戊寅年 호랑이는 그렇게 지지 말길) . 그런데 참을성은 남의 말을 알아 듣고 그 뜻을 알아 채는데도 필요하다.

전도 (前途)에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조짐을 미리 알려면 우선 그 조짐을 참을성 있게 분석하고 전조 (前兆) 를 알아채야 하는 것이다 (丁丑年 소는 그걸 몰랐다) .

1996년 12월23일, 현대경제연구원의 손영기 연구원은 '외환 보유고 적정한가' 라는 연구보고서를 만들었다.

이 보고서는 우리나라의 외환보유고가 국제통화기금 (IMF) 이 권장하는 적정 수준 이하로 내려갔다고 경고했다.

IMF기준은 월평균 경상적자의 2.5개월분. 96년 11월 현재 3백32억달러가 돼야 하는데 실제 보유고는 3백23억달러로 기준보다 약 10억달러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는 거기서 오는 '부작용은 제어하기 어렵고 거시경제 전반에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고 지적했다.

해가 바뀌어 1997년 1월3일, 같은 연구원의 양두용.김연호 연구원은 '한국의 외환위기 가능성' 이라는 연구보고서를 만들었다.

이 보고서는 한국의 경제지표가 94년의 멕시코와 비슷하게 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경상수지 적자 비율이 국내총생산 (GDP) 의 5%를 넘어설 경우 외환위기가 온다는 것이 정설. 그런데 한국의 적자는 96년 8월의 2.3%에서 96년 11월 4.5%로 급격히 늘어났다고 이 보고서는 경고했다.

참고로 멕시코에 외환위기가 닥쳤을 때의 비율은 7.8%. 이 보고서는 한국에 외환위기가 닥치면 미국이 멕시코를 도운 것처럼 그런 '절대적인 선진국의 도움은 기대하기 어렵다' 고 지적하고 'IMF나 세계은행 (IBRD) 등과 협력관계를 공고히 하라' 고 권유했다.

이 두 보고서는 1년을 앞서 오늘의 IMF 사태를 경고했다.

특히 선진국의 도움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예견은 그대로 적중했다.

한국의 구제금융 신청 소식이 세계의 톱 뉴스가 되고 며칠후 미국의 정.재계 여론은 한국을 파산시키는 것이 더 낫겠다고 공공연히 떠들어댔다.

미국이 한국에 빌려준 돈은 1백억달러밖에 안되니까 차라리 그것을 떼이더라도 딴 나라를 돕는 것이 낫다는 주장도 있었다.

한 보름 뒤 미국이 1백억달러 조기 지원에 동참하기로 결정하기까지에도 미 재무장관의 극력 반대가 있었다.

한국과의 안보 유대를 중시하는 클린턴 대통령의 간곡한 설득이 없었더라면 이것도 성사되지 못할 뻔했다.

"모름지기 빚독촉이 얼마나 가혹한지를 남이 말할 때 알아듣고 미리 아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제 알겠군.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위기를 예견할 기회는 그전에도 여러차례 있었던 것 같아. 96년 가을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 가입에 관한 찬반논쟁이 벌어졌을 때 남들은 다 좋다는 이 부자클럽에의 가입을 왜 극력 반대했는지 그 반대론자들의 말을 좀더 귀담아 들어야 되지 않았을까. " "그보다 훨씬 전인 95년 2월 동아시아의 성장은 창의력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자원총동원령' 에 근거한 것이라 더 이상의 성장은 없다고 한 스탠퍼드대 폴 크루그먼 교수의 말을 들었어야 하는데. " "그보다 더 전에 궁궐 같은 백화점이 무너져 내리고, 더 전에 멀쩡한 한강 다리가 밑으로 떨어졌을 때 그 의미를 알아채고 그 조짐을 미리 알았어야 하는데…. "

김성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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