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 난장 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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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제1장 슬픈 아침 ①

양수리 4킬로. 어둠 속에서도 뚜렷하게 다가서던 이정표가 스쳐가던 순간, 그는 무심코 시계를 보았다.

오후 8시. 점심을 거른 채였지만, 이상하게 시장기를 느낄 수 없었다.

두 번의 끼니를 걸렀는데도 공복감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은 그의 일상생활에서는 좀처럼 경험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그는 오른편 차창으로 힐끗 눈길을 돌려 밤빛 속에서 검회색으로 흘러가는 강물을 보았다.

그리고 두 손으로 핸들을 부둥켜 안듯 꽉 잡고 정면을 주시했다.

대화를 나눌 상대도 없이 혼자 몰고가는 승용차 안에서 보여주는 그런 행동은 집으로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다시 연료계기판을 보았다.

출발할 때부터 뚜렷한 목적지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연료는 보충해야 할 것 같았다.

2차선인 중앙선 왼편 도로에서는 서울로 진입하고 있는 차량들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

마주 오는 차량들의 전조등 불빛과 마주칠 때마다 그의 승용차는 속도감을 잃고 주춤거렸다.

백미러로 승용차의 뒤 쪽을 살펴 보았다.

네다섯을 헤아리는 차들이 간격을 좁힌 채 그를 바싹 뒤따라오고 있었다.

그는 달려가고 있었지만, 사실은 앞과 뒤에서 쏘아대는 자동차들의 전조등에 포위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견디다 못한 그는 마춤한 길 가장자리를 찾아 차를 멈추고 말았다.

십여분 동안, 경적으로 재촉하며 끈질기게 뒤따르던 차들이 쏜살같이 그를 앞질러가기 시작했다.

그는 검은 물너울이 희번득거리며 소용돌이치고 있는 강변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물비린내가 코 끝을 스치는 강가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두 끼니를 굶었는데도 가슴 속은 오히려 체한 것처럼 더부룩했다.

심호흡을 하고 나서 돌멩이 하나를 무심코 집어 들었다.

달은 짙은 회색의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은 달이 뜰 시각이 아닌지도 몰랐다.

수염 달린 시인이 살고 있는 도회지 변두리 마을에,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정전사고가 일어났다.

순식간에 들이닥친 칠흑같은 어둠에 변두리 마을 사람들은, 하나같이 호흡이 떨컥 멎는 듯한 참혹한 적막감 속으로 침몰하고 말았다.

그런데 바로 그 정전사고가 시인으로 하여금 십여년 동안이나 전혀 바라본 기억이 없었던 달을 발견하게 만들었다.

시인은 그동안, 하늘에는 그 도도한 빛을 잃지 않는 짙푸른 달이 있다는 것을 망각한 채, 일상의 소용돌이 속을 걸레같이 살아왔다는 회환에 젖었다.

오염된 먼지들이 켜켜로 내려앉은 초라한 장독대 위로 쏟아지는 희안한 달빛을 바라보는 순간, 시인의 가슴은 겁없이 북받치고 말았다.

짜증을 내는 늙은 아내를 마루로 불러냈다.

그리고 오랜만에 그야말로 오랜만에 시인은, 무슨 추잡한 짓이냐고 앙탈하는 늙은 아내의 속치마를 가까스로 벗겨내고, 길바닥에서 부녀자 겁탈하듯 그 일을 치렀다.

식도에서 터져나오는 희학질 소리가 이웃의 담장을 넘어가도 전혀 개의치 않았던 격렬한 섹스였었기에, 수염 달린 시인과 늙은 아내는 그 일을 치른 후 이틀 동안이나 앓아 누웠었다.

신문에 발표되었던 시인의 산문시를 가위로 오려 서랍에 넣어 두었던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돌멩이를 강물 속으로 멀리 내던졌다.

갓길로 올라와서 승용차의 시동을 걸기 전에 담배 한개비를 피워 물었다.

어둠 속으로 어림되는 노폭은 차를 그 자리에서 당장 서울 방향으로 바꿀 수 있을 만큼 넉넉했다.

마주 오던 차들의 통행도 그 순간만은 뜸했다.

그는 시동을 걸었다.

하지만 가던 방향 그대로 차를 몰았다.

검문소가 자리잡고 있는 양수리의 세 갈래 길에 당도한 그는 잠시 망설였다.

왼편의 좁은 도로는, 외관의 치장들이 과장된 러브호텔들과 유리벽이기 때문에 오히려 은밀함이 노출된 카페들이 들어선 북한강의 강변길이었다.

그 길의 끝에서 철길 건널목을 지나 경춘가도로 들어서면, 곧장 대성리에 닿았다.

그러나 오른편에 바라보이는 양평대교를 건너면, 강원도로 가는 길이 되고, 그 길의 먼 가장자리에는 푸른 동해가 자리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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