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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알제리,하씨 메싸우드'(3)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6면

자넨 그래도 적응력이 뛰어난 편이더구만…… 사막 말야, 사막. 그는 입 안에 새우살을 우물거리며 계속 말하고 있었다.

루피도 내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당신은 담배만 있으면 사막에 평생을 살아도 남부러워 하지 않을 거야. 그는 내게 영어로 더듬더듬 말하며 필터가 짧은 알제리 담배를 건네주었다. 나는 담배를 건네받으며 그저 웃을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루피가 있는 날은 그래도 재미 있었다.

그는 알제리 국영 석유회사의 수퍼인텐던트였는데 수도 알지에와 현장과 하씨를 오가며 물자보급과 현장 상황보고 따위의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는 종종 내가 있는 보급기지에 와 손톱을 다듬으며 하루 종일 사하라 사막만 바라보고 있기도 했는데 그때도 우리는 보통 하루에 열 마디 이상은 하지 않았다.

그것도 대개는 인샬라니, 꼬몽 딸레 부니 인사말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가 옆에 있다는 것으로 난 오랜 친구를 얻은 듯 싶었다.

나는 그의 낙천적인 미소를 매우 좋아했다.

그는 하씨에서 하루 열 시간 손톱을 다듬으며 웃을 수 있는 유일한 친구였다.

- 그 T사 직원 녀석이나 최인철과장도 사막에 당했지. 아주 호되게 당했어. 양놈들이야 달마다 휴가를 주고 놀게 해주니까 문제없지만 어디 우리 회사는 그래?

또 T사도 마찬가지일테고. 그러니 한두 달 여기 있으면 도는 거라고. 아주 미쳐버릴 것 같지. 나도 맨 처음에는 그랬어. 그러면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 아나?

나 같은 경우는 말야,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얘기를 했지. 아무 얘기나 되는 대로 씨부리는 거야. 영어든 불어든 한국말이든, 알아듣건 말건 상관없어. 가족이나 시추 상황, 아프리카, 되는 대로 막 얘기하는 거야. 그럼 반응이 어떤지 아나? 헵터라는 놈, 백발마귀 같은 그 놈은 그저 웃고만 있는 거야. 또 알제리 놈들은 하나같이 못 알아 들으면 인샬라 하고는 등을 돌리고 말아. 답답하지. 현장 가서 최대리랑 있으면 그게 제일 재미있지만 내가 어디 기지 바깥에 맘대로 나갈 수 있느냔 말야. 최대리도 또 제 나름대로 할 일이 있는 거고. 그래서 내 하나 절실히 배운 게 있지. 사막에서는 어디를 가든 혼자라는 것. 자신의 고독을 남이 덜어줄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말 것. 바로 그거야. 사막에서는 말야, 영원히 혼자일 뿐이라고. 김부장은 오늘 유난히 말이 많다.

그가 이처럼 많은 얘기를 하는 것은 내가 하씨에 있는 동안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는 통 말이 없었다.

내가 첫인상에서 느꼈던 것과는 달리 그는 그닥 자신감도 능력도 의지도 없는 듯했다.

근 삼개월 동안 이곳 보급기지에서 생활하면서 그에게서 뭘 볼 수 있었던가.

그는 저녁 식사가 끝나면 대개 새벽까지 알아들을 수 없는 알제리 방송을 지켜본 후 다음날 내가 본사에 보낼 일일 보고자료를 다 정리할 때쯤이면 어깨에 수건을 둘러매고 사무실에 나타났다.

뭐 별다른 거 없지?

그는 내게 지나가는 투로 말을 던진 뒤 창가로 가 한동안 반사되는 햇빛에 눈부신 사막을 지켜보았다.

그리곤 눈살을 가늘게 찌푸리며 여전하군 하며 혼잣말을 했다.

부장이 나를 지나쳐 다시 막사로 돌아가면 저녁 식사 시간까지는 다시 그를 볼 수 없었다.

기실 나도 그 편이 좋았다.

그와 나와의 사이에 가로놓인 침묵은 내게도 부담스러웠다.

어쨌거나 사무실에서는 나 혼자 있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동쪽 지평선에 떠오르는 붉은 태양을 보며 일어나면 전날의 보고자료와 현장으로부터 간밤에 들어온 팩스를 정리해 본사에 역시 팩스로 넣어준다.

그리고나서 현장에서 주문한 물품을 파악하고 알제리 업자를 통하여 필요한 물품이나 장비를 주문해 가져온 물품의 내용과 수량을 파악하여 접수하거나 현장에 중계를 해준다.

그러한 일들이 대개 정오까지는 끝났다.

오수 시간이 시작되고 오후 내내 이어지는 알제리인들의 이해할 수 없는 느긋함 때문에 일이 지연된 경험이 몇 번 있었다.

그래서 난 되도록 시간 안에 일을 끝내도록 노력했던 것이다.

지금이야 요령이 붙어 그것이 그닥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T사 직원이 떠나고 난 직후 그의 책상에 대신 앉게 되었을 때는 현장에서 요구하는 물품을 누구에게 주문해야 하는지조차 몰라 허둥대었다.

인수인계를 위해 며칠간 머물러 있던 T사 직원은 이틀만 지나면 다 알게 된다면서 책상 서랍만 뒤적거리고 있었다.

뭐라 물을라 치면 고개를 돌리고 쏘아보는 눈빛에 알 수 없는 적의가 비쳐 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뭔지 모르면 그냥 인샬라라고 해요. 그럼 그 쪽도 그럴테니까. 그럼 된 거예요. 대체 사막 한가운데서 뭘 바랄 게 있다고. 그는 하던 행동을 멈추지 않고 내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는 이틀 뒤 우리에게 인사도 없이 지프차를 타고 먼지를 일으키며 동쪽으로 사라져 갔다.

저 새낀 성격 더러운 놈이야. 어디 지만 고달픈가.

부장은 우글라로 이어지는 도로로 들어서는 지프에 눈길을 주며 말했다.

- 그런데, 자넨 참 대단하단 말야. 내 놀랬다구. 자넨 마치 사막이 완전히 체질인 사람 같아. 내가 보기에 자네는 완전히 사막에 동화된 사람 같다구. 어떻게 삼개월 동안 휴가도 한 번 안 가지?

부장은 레스토랑에서 포도주 한 병을 거의 혼자 다 마시고 취해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내가 차를 운전해야만 했다.

보급기지에 도착하여 난 잠을 자고 싶었지만 부장이 팔을 잡고 끄는 바람에 그의 숙소에 따라 들어갔다.

부장은 튀니지에서 사온 거라며 냉장고에서 캔 맥주를 두 개 꺼내 나에게 하나 주었다.

캔 맥주에는 무슨 뜻인지 모를 아랍어가 씌어 있었다.

뒷맛이 흑맥주 비슷했다.

- 자네 그게 무슨 뜻인지 아나?

그는 육포를 꺼내며 내가 들고 있는 캔 맥주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 그건 지중해란 뜻이야. 자넨 아직 지중해를 한 번도 못 봤지?

그 파란 물빛을 말야……그건 사람의 혼을 빼놓지. 입가에 흔연한 미소를 띄고 있다가 그는 돌연 정색을 하며 나를 보았다.

- 헌데 이상한 건 튀니지에서 휴가를 보낼 때 수영도 하고 몇 시간씩 바다를 보며 백사장에 누워 있기도 했는데 말야. 그때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는 거야. 난 오히려 여자들 엉덩이나 쫓아다녔다구. 그런데 이상하게도 꼭 여기 있으면 그 파란 바다가 생각나 미치는 거야. 침대에 누워 있으면 그 바다가 나를 향해 쏟아지는 것 같아 숨이 막힐 지경이라고. 자네도 알잖나. 내가 튀니지 국경 넘다가 데저트 패스포트 뺏긴 거. 그때도 지중해가 보고 싶어 미칠 것만 같더라고. 창 밖은 온통 먹빛에 사방은 고요하기만 하니까 오만 가지 잡념이 다 떠오르는 거야. 그때 지중해 생각이 나더라고. 그 끝을 알 수 없는 바다 속으로 들어가 나도 파란빛이 되고 싶더라고. 자네는 아마 그 기분 모를 거야. 그래서 막사에서 튀어나와 튀니지 국경을 넘었지. 그런데, 자네 내가 거기 가서 뭘 한지 아나?

그는 지갑에서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을 꺼내 내게 보여주었다.

거기엔 알제리인인 듯한 여자가 정면으로 고개를 약간 비튼 채 애교스럽게 윙크를 짓고 있었다.

- 얘를 꼬셨지. 마브루카라고 외국인 전용 클럽에서 춤추는 애야. 지중해는 무슨 지중해. 막상 가니까 그런 것 따윈 아예 까맣게 잊어버리게 되더라고. 난 근처 클럽에 들어가서 얘를 데리고 나왔지. 그래서 그날 밤 같이 호텔 방에서 뒹굴었어. 그는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그때를 나도 기억한다.

사무실에도 안 들르고 막사 쪽에서도 그의 기척을 느낄 수가 없어 궁금해 하던 차였다.

회사 차마저 없길래 현장에 갔나 싶었다.

오후쯤 돼서 그가 문을 덜커덩 열고 들어오더니 여권이랑 데저트 패스포트를 뺏겼다는 것이었다.

그는 수염도 깎지 않은 채 점퍼 차림으로 후줄그레한 모습이었다.

데저트 패스포트야 다시 발급을 받으면 그만이지만 여권은 뺏기면 좀처럼 돌려받을 수가 없어서 꽤 큰 문제거리였다.

그는 허둥대고 있었던 것이다.

여권은 달라 그래도 절대 보여주지 말라고 내게 엄한 주의를 주었던 것은 바로 그였다.

그런 그가 여권을 뺏기다니. 국경을 무사히 통과했는데 얼마 못가서 알제리 무장 경찰에게 걸렸다는 것이었다.

사실 큰 문제가 아니면 데저트 패스포트를 보여주고 석유회사 직원이라고 하면 눈감아주는 게 보통인데 재수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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