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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로 짚은 97]학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연초부터 노동계의 파업으로 위기에 대한 인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자본주의 만능을 경계하는 이론서들이 많이 읽히게 되었다.

앤서니 기든스.임마누엘 월러스타인등이 대표적인 인물. 문민정부의 한계를 분석하는 논문과 발표회가 여럿 있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김정기)가 실패한 개혁의 역사를 들춰내며 현 문민정부의 실패를 분석한 강좌가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6.10민주화운동 10주년을 맞아 한국정치학회와 한국사회학회등이 개최한 심포지움은 민주화 이행을 다뤘던 과거와 달리 민주주의 공고화가 주요 이슈가 됐다.

하반기로 접어들면서 '수평적 정권교체' 를 둘러싼 찬반논쟁등 대선전략이 쟁점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대선캠프 줄서기 상황이 연출되면서 이같은 쟁점은 실종되고 말았다.

위기가 전면에 드러나기 시작하자 포스트모더니즘과 정보화사회론등 미래사회에 대한 낙관적 철학이론들이 급격히 소멸하는 모습을 보였다.

간간히 '몸' 을 주제화한 논의가 없지 않았으나 과거처럼 선정적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김영민 (한일신학대.철학).조동일 (서울대.국문학).조혜정 (연세대.사회학) 교수 등의 탈식민지 시대의 새로운 글쓰기 모색이 두드러졌다.

'탈식민지성' 과 관련, 동양적 사유에 대한 관심이 인문학자들 사이에서 증가했던 것도 한 특징. 하지만 학계 전반을 관통하는 거시적 쟁점을 형성하는데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올해만도 '열린 지성' (교수신문사) '당대비평' (당대) 등 다수의 교양학술지들이 창간됐음에도 생산적인 대안를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오히려 연말에는 사회과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모색과 인문학의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자기반성이 이뤄지기도 했다.

특히 최근 국가부도사태와 관련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제공하지 못한 학계의 자기비판이 심각하게 대두하기도 했다.

그나마 현재의 위기가 경쟁을 절대화한 신자유주의에 원인이 있다고 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공동체 모색이 학계 저변에서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것도 주목할만 한 현상. 올해에는 큰 사건이 유난히 많았다.

고영복교수 간첩사건이나 황장엽 망명사건은 학계를 놀라게 한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원장 이영덕) 이 '한국학중앙연구원' 으로 개칭하고 지금까지의 이데올로기 교육기관에서 명실상부한 연구기관으로 변신하려 한 시도도 한 사건이었다.

세계적인 정치학 석학들이 서울에 모인 세계정치학회 서울대회는 지금까기 국내학계에서 치뤄보지 못한 명실상부한 국제적인 학술대회였다.

김용섭 (전연세대).조동걸 (전국민대) 교수등 민족사학 1세대, 동양사학의 기반을 닦은 민두기 교수 (서울대) 의 정년퇴임은 사학계의 세대교체 현상을 보여줬다.

학문시장 경쟁이 가속화되면서 전국 단위의 학회들이 논문게재료를 받기로 한 것도 주목할만한 변화. 외국학위 취득자가 준 것도 기현상 중에 하나였다.

세계화를 표방하면서 해외유학자가 급증했음에도 학위취득자는 94년 이후 급감하고 있는 것. 학술진흥재단 (이사장 김종운) 이 집계한 해외 박사학위 취득자는 93년 2천3백65명, 94년 4천7백82명으로 급증했다가 95년 2천23명, 96년 1천8백73명, 올해 1천3백94명으로 급격히 줄고 있다.

유학생 중에 실제로 연구자들은 많지 않았음을 입증한 셈.

김창호 학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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