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에서] 평화 시위의 모범 답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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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홍콩이 또 한번 평화 시위의 모범 답안을 보여줬다. 53만명(야당 측 주장)이 참가하는 가두 시위가 한바탕 축제처럼 치러진 것이다.

1일 오후 홍콩 중심가의 간선 도로 5㎞는 보통선거(직선)를 요구하는 인파로 가득 찼다. 홍콩을 간접 통치하는 중국을 겨냥한 것이었다. 섭씨 35도의 폭염 속에서 2007년 행정수반 선거(현행 간접 선출)와 2008년 입법회(60석 중 30석만 직선)선거를 보통 사람들의 손으로 뽑게 해달라는 염원을 드러냈다.

직선제 구호의 위력은 대단했다. 유모차에 누운 젖먹이와 휠체어를 타고 나온 장애인, 걸음걸이가 흔들리는 노인까지 가세해 '정치를 국민에게 돌려달라(還政於民)'고 요구했다. 1987년 한국의 6월 민주화 항쟁을 연상시켰다.

인상적인 것은 시위 방식이었다. 홍콩인들은 스크럼과 운동 가요가 아니라 각양각색의 구호.플래카드와 퍼포먼스(행위 예술)를 동원했다.

음악을 틀면서 춤과 노래로 즉석 공연을 하는가 하면 대형 새장 속에 옷을 입힌 마네킹을 넣어 홍콩의 민주.자치를 옥죄는 중국을 꼬집기도 했다. "7년이 좋았느냐(七個好年?)"는 플래카드가 눈길을 끌고, '데모크라시'를 외치는 외국인에게 손뼉을 쳤다. 친(親)대만 시위대는 중국 혁명의 아버지인 쑨원(孫文)의 초상화에 "민주화 없이 중국 통일은 없다"고 적었다.

시위 규모는 지난해 7.1 때와 비슷했지만 분위기는 훨씬 경쾌했다. 7시간 동안 계속된 시위에서 물리적인 충돌은 단 한건도 없었다. 5차로 도로 중 한가운데는 비상 차선으로 남겨졌다.

홍콩 정부의 대응 역시 유연했다. 시위대의 목적지인 정부 청사 내부의 도로를 개방하고, 버스.지하철을 증편해 귀가를 도왔다. 청사 담장에 민주화를 기원하는 '노란 리본'이 매달리는 걸 경찰은 팔짱을 낀 채 지켜봤다.

홍콩 사회의 민주 의식은 제법 민주화가 됐다고 자부하는 한국.대만의 그것을 훨씬 뛰어넘고 있었다. 그들의 시위문화가 참으로 부러웠다.

이양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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