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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 칼럼]양심수와 IMF사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DJ가 당선되면 이민가겠다는 사람들이 많더라. " 그런 소리들이 선거 전에 떠돌았다.

단순히 선거용 흑색선전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랫동안 그에게 각인된 진보적 이미지에 대한 보수층과 기득권층의 거부감이 그렇게 표현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

아직도 '양심수' 가 있다는 그의 발언은 체제비판적으로 비쳤다.

그것이 국민회의측 주장처럼 안기부의 북풍 (北風) 공작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광주항쟁 이후 80년대 진보파들은 광주를 중심으로 움직였다.

군사정권에 대한 증오가 친북파를 포함한 좌파세력을 양산했고 그런 유파들이 제도권에 들어와서는 주로 DJ에 대한 비판적 지지노선을 택했던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노조문제나 재벌문제에 대한 정책에선 그런 시각이 엿보이기도 한다.

그는 재벌문제에 대해선 표면적으로는 신중한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때때로 부정적인 시각이 노출됐다.

대선TV토론에서 그는 위성방송정책을 설명하면서 "재벌이 언론마저 장악하게 할 수 없다.

중소기업의 컨소시엄 형태로 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

수백개의 상업전문 채널이 쏟아지는, 언론이기보다 비즈니스가 돼버린 국제적인 다채널 디지털 방송의 환경에서도 그의 방송관은 진보주의자들의 그것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이다.

노조에 대한 그의 생각 역시 비슷하다.

그는 국제통화기금 (IMF) 대책으로 실업문제를 가장 중요시했다.

고통분담의 차원에서 임금을 깎더라도 고용안정이 가장 긴요하며 그것을 위해 재협상할 뜻을 시사했다.

아마 초긴축으로 인한 한계상황이 오더라도 노동자들은 金당선자가 그들의 편에 설 것으로 기대할 것이다.

그의 오랜 정치적 라이벌인 YS는 벼랑끝 경제를 그에게 물려주었다.

"국가가 숨 넘어가는 상황에 놓여 있다.

기뻐할 때가 아니다" 고 한 그의 말은 그가 국가의 파산상태에 대한 위기의식을 갖기 시작했다는 뜻으로 들린다.

이미 그는 고용안정을 최우선으로 하겠다는 공약에서 한발 물러서 불가피할 경우 정리해고를 받아들일 방침을 시사했다.

그는 IMF 협약을 1백% 이행할 수밖에 없다는 말도 했다.

국가의 모라토리엄 상태가 오는 상태에서 다른 도리가 없을 것이다.

그가 아직도 중소기업 육성을 근거로 한 대중경제론과 같은 낡은 이론으로 핫머니가 들락거리는 국제금융시대에 대처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현명치 못할 것이다.

자민련 소속의 3공 개발독재 시절 경제전문가들로 세계무역기구 (WTO) 시대의 글로벌 경제를 요리하겠다고 나서는 것도 적절치 못하다.

그는 IMF로부터 재벌을 수술할 칼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또 작고 불간섭적인 정부를 구성해 투명한 자유시장경제로 구조조정을 추진해야 하는 서로 모순된 역할도 부여받았다.

그는 초긴축정책으로 재정을 졸라매야 하는 인기 없는 정책을 취해야 하면서 동시에 수많은 복지정책의 시행을 약속한 부담도 지고 있다.

만약 기업들의 연쇄부도 사태로, 또는 IMF 약속에 따라 기업간의 인수.합병 (M&A) 으로 대량해고 사태가 일어났을 때 그는 노동자들의 편에만 설 것인가, 수많은 실업자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면 그는 무슨 말로 그들을 설득할 것인가.

만약 그가 IMF 협약의 충실한 준수를 약속하고서도 고용안정정책을 추진한다면, 그가 구조조정의 칼을 정치적 목적으로 마구 휘두른다면, 그가 친북통일론자들을 양심수로 규정한다면 무슨 수로 중산층의 협력을 얻어내고 미국.일본 등 주변 국가들의 신뢰성을 쌓아갈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는 널리 인재를 모아 거국비상내각을 구성해 난국을 헤쳐갈 뜻을 천명했다.

그런 점에서 자민련에도 공동집권의 약속에만 매달리지 않는 비상한 선택이 요구되는지도 모른다.

그의 새 정부에 가장 필요한 것은 아마도 국가 신인도 (信認度) 일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국내외에서 가장 확인하고 싶은 것은 '진보주의자 김대중 (金大中) 의 신인도' 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가 진보적 인권투사에서 현실적 자유경제론자로, 강력한 카리스마적 권력론자에서 민주적 개혁주의자로 변신하는 모습을 기대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김영배 뉴미디어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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