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는 진흙인형'의 마술사 노준…'깜찍광고' 일곱편 히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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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4면

천히 기어가는 달팽이들 사이로 탄산음료를 등에 얹은 거북이가 쌩- 지나간다.달팽이 왈,“뭐가 지나갔냐?”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서….”대충 짐작하겠지만 모 음료회사의 TV 광고다.어른들은 “저게 도대체 뭐야”하지만 아이들은 즉각 반응을 보인다. 말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아이들이 이 광고만 나오면 “깜띠기,깜띠기”하며 음료 이름을 따라한다.한마디로 ‘뒤집어진다’는 말씀.“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고민 많이 했어요.”광고에 등장하는 달팽이와 거북이 인형에 생명을 넣어준 점토 애니메이터 노준(28·서울대 조소과 석사과정 수료)씨의 말이다.그는 한국 점토 애니메이션계의 독보적인 인물로 꼽힌다.점토로 제작된 TV 광고 대다수가 그의 손을 거쳤다.그래봐야 7편뿐이긴 하지만 모두 장안의 화제가 됐다.그가 점토 애니메이션 광고를 처음 제작하게 된 것은 대학교 2학년 때인 90년.우연히 알게된 한 광고제작사 감독과 미국의 점토 애니메이션 광고에 관해 이야기하다 ‘우리도 한번 해보자’고 의기투합한 것.얼떨결에 모 제약사의 어린이 비타민제제 광고를 제작하게 됐다.점토 애니메이션에 있어 당시 한국은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탓에 자신의 상상력만을 믿고 인형을 만들었다. “지금처럼 색깔이 배어있는 유토(油土)를 사용한다는 것도 몰랐고 한번에 얼마나 움직여야 자연스러운 동작이 나오는지도 감감했어요.”하지만 그는 열정 하나로 매달렸다.쟁반위에 있던 생선이 사라지면서 야자나무가 등장하고 다시 어린아이 모습으로 변하는 첫 작품은 그렇게 탄생했다.이후 제작한 제과회사와 자동차업체,전자업체 등의 광고에서도 그의 신선한 감각은 돋보였다.특히 마릴린 몬로가 엘비스 프레슬리로 변신하는 모 업체의 휴대용 카세트 광고는 선풍적 인기를 모았다.이 20초짜리 광고의 촬영기간만도 2개월 정도.1초를 찍기 위해 보통은 1∼2일이 걸리나 이 작품은 섬세한 동작이 많아 더 어려웠다고 한다. 아무런 지식과 기반도 없던 그가 점토 애니메이션계의 '거물급' 이 된 데는 그의 정성도 한몫한 것 같다.

“자연스러운 장면을 만들기 위해 실제로 움직이는 사람을 캠코더로 찍었어요. 한 장면씩 보면서 따라 움직이게 하는 거죠. 달팽이도 마찬가지였어요. 식용 달팽이를 구해서 움직이는 모습을 자세히 관찰했죠. ” 그런데 순수예술인 조각 전공자로서 광고를 제작하는 것은 혹시 배고픈 예술보다는 상업적 성공을 택한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그렇지 않아요. 저의 가장 큰 관심은 '소통' 이거든요. 예를 들어 '냉장고를 위한 조각' 이란 제 작품은 자석을 바닥에 붙인 빵모양의 석고덩어리일 뿐인데요, 전시회 때 원하는 사람에게 나눠줬어요. 제가 만들어 전시하고 사람들이 집어가서 그걸 냉장고에 붙임으로써 작품이 비로소 완성되는 거죠. 예술 생산자와 소비자의 직접적 교류, 그것이 제 예술관이죠.” 결국 그에겐 광고 제작도 보다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인 셈이다.

자본만 해결된다면 영화도 제작해보고 싶다는 그의 당면계획. “공익광고를 제작하고 싶어요. 무료로 해드릴테니 요청만 해주세요. '경제 살리기' 에 저도 한몫 해야죠. ”

글=문석·사진=주기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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