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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권력자가 딸에게 “무슨 일 있어도 연애결혼해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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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호 33면

1951년 여름 아버지와 함께한 마오쩌둥의 딸들. 오른쪽이 리민, 왼쪽이 리너. 김명호 제공

마오쩌둥(毛澤東)에게는 리민(李敏)과 리너(李訥)라는 두 명의 딸이 있었다. 리민은 마오와 허쯔전(賀子珍)과의 사이에 태어났다. 리너의 생모는 장칭(江靑)이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09>마오쩌둥(毛澤東)과 두 딸

리민은 1936년 겨울 산시(陝西)성 바오안(保安)현의 동굴에서 태어났다. 중국 공산당 중앙이 옌안(延安)에 정착하기 전이었다. 이듬해 말 임신 중이던 허쯔전은 마오의 만류를 뿌리치고 혼자 소련으로 떠났다. 소련에서 아들이 태어났지만 곧 세상을 떠났다. 낙심한 허쯔전이 적적해한다는 소식을 들은 마오는 네 살이 채 안 된 딸을 엄마 곁으로 보냈다. 허쯔전은 마오의 첫 번째 부인 소생인 마오안잉(毛岸英)과 안칭(岸靑) 형제를 돌보고 있었다. 리민은 이마노프에 있는 ‘국제아동보육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의 모습은 뇌리에서 점점 사라졌다. 보육원 강당에 국제주의자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주더(朱德)도 있고 마오쩌둥도 있었다. 리민은 훗날 “오빠들이 아버지의 초상화를 가리키며 우리 아버지라고 했다. 주석처럼 위대한 인물이 내 아버지라는 말을 믿지 않았다. 오빠들이 놀리는 줄 알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모녀는 47년 귀국해 하얼빈에 2년간 머물렀다. 49년 봄 리민은 “사람들은 주석이 나의 친아버지이고 내가 주석의 친딸이라고들 한다. 나는 소련에 있었기 때문에 주석을 본 적이 없을뿐더러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뭐가 뭔지를 모르겠다. 주석이 내 친아버지가 확실한지, 내가 주석의 친딸이라는 말이 맞는지 빨리 알려주기 바란다. 사실이라면 주석이 있는 곳으로 가겠으니 나를 데리러 오라”는 편지를 마오 주석 앞으로 보냈다. 중국어를 몰랐기 때문에 러시아어로 쓰는 수밖에 없었다.

편지를 읽은 마오는 박장대소했다. 그 자리에서 “네 편지를 봤다. 너는 내 친딸이고 나는 네 친아빠다. 많이 컸겠구나. 생각만 해도 기쁘다. 빨리 아빠가 있는 곳으로 오기 바란다”는 전보를 보냈다. 갓난애기 때 부르던 자오자오(<59E3><59E3>)가 수신자였다. “봐라, 우리 집안에도 외국어를 아는 사람이 생겼다”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한바탕 자랑을 늘어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49년 초여름 마오는 허쯔전의 동생을 하얼빈으로 보내 리민을 데려오게 했다. 허쯔전은 당의 지시에 따라 상하이로 내려가 정착했다. 리민은 장칭의 소생인 리너도 처음 만났다.

마오쩌둥은 애칭으로만 불리던 두 딸에게 “쓸데없는 말을 적게 하고, 해야 할 일은 민첩하게 행하는 사람이 되라”며 논어(論語)에 나오는 민(敏)과 눌(訥)을 한 자씩 사용해 제대로 된 이름을 지어 줬다. 성은 마오(毛)가 아닌 리(李)를 쓰게 했다. 마오는 국민당의 체포를 피해 도망 다니던 시절 리더성(李得勝)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적이 있었다. 국민당의 최정예 부대의 맹공을 피해 옌안을 포기하고 철수할 때도 떠나면(離) 승리할 수 있다(得勝)는 의미에서 이 이름을 사용했다. 리(李)는 리(離)와 발음이 같다.

리너는 마오와 장칭의 외동딸로 40년 옌안에서 태어났다. 전쟁으로 날을 지새우던 시대였지만 아버지 옆에서 편안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마오는 한번 일을 시작하면 뜬눈으로 밤을 새울 때가 많았다. 어느 누구도 감히 휴식을 권하지 못했지만 리너만은 예외였다. “아빠, 우리 산보하러 가자”고 손을 잡아끌면 마오는 싱글벙글하며 따라나섰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됐을 때 리민은 13세, 리너는 9세였다. 두 딸은 중국의 최고 통치권자가 된 아버지와 함께 중난하이(中南海)에서 살며 정규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마오는 두 딸의 생활방식이나 학교 공부에 관해 엄격할 정도로 요구하는 것이 많았다. 그러나 결혼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연애결혼을 해야 한다고 틈날 때마다 주입시켰다. 리민은 대학 시절 사귀기 시작한 해방군 포병 부사령관의 아들과 결혼했다. 사귀는 남자의 부모가 뭘 하는 사람인지 궁금해하지 않고 자신이 누구의 딸이라는 것도 말하지 않는 바람에 남자 쪽에서 짜증을 낸 적이 많았다고 한다. 59년 마오는 리민의 결혼식을 직접 주재했다. 하객들에게 일일이 술을 따르며 평소 잘 마시지 않던 술이었지만 그날은 대취했다.

리너는 베이징대 역사학과를 졸업했다. 아버지 옆에서 오래 생활한 탓에 시(詩)와 사(詞)에 능하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서법도 마오와 장칭의 가르침으로 일가를 이루었다. 초대소 직원과 결혼했지만 문화의 차이로 오래가지 못했다. 73년 공산당 제10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만났다.

마오의 딸들은 아버지 생전에 특권을 누린 적이 없고 사후에도 물려받을 만한 유산이 없었다. 마오는 두 딸이 과학자나 정치가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문학가도 마찬가지였다. 보통 노동자가 돼 자력 갱생하기를 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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