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에 얼어버린 중소기업 정책자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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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미 기계를 발주했는데 정부에서 약속된 자금이 지원되지 않아 생돈을 빌려 위약금을 물어야 할 처지입니다.” 서울마포의 소규모 기계 제작업체인 M라미네이팅의 여 (呂) 모 사장. 그는 인건비 부담을 덜기 위해 자동화 설비를 들여놓기로 하고 지난 9월 중진공의 구조개선자금 3억1천만원을 배정받았다.

하지만 국제통화기금 (IMF) 긴급자금지원이후 은행권이 얼어붙는 바람에 그 불똥이 튀어 은행으로부터 대출이 어렵다는 통보를 받고 난감해졌다.

평소같으면 돈을 잘 내주던 은행이었지만 웬일인지 담보 물건이 이미 타은행에 1차 담보로 잡혀 있어 곤란하다는 이야기만 원론적으로 늘어놓으며 대출을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은행측은 일단 "내년1월까지 기다려보라" 고 말하지만, 呂사장은 과연 자금을 지원받을수 있을지 걱정이 태산이다.

이처럼 IMF충격의 여파로 중소기업에 대한 정책자금 지원이 큰 차질을 빚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그나마 배정된 정책자금도 상당부분이 해당 기업의 담보부족등을 이유로 은행 창구에 묶이는 경우가 많아 시설투자등을 연기할 수밖에 없는 중소기업이 속출하고 있다.

대표적인 정책자금인 구조개선사업자금중 일부를 자체 조달하기 위해 중소기업진흥공단이 올해 세워놓은 채권 발행 목표는 8천7백억원. 그러나 11월말까지의 채권발행 총액은 6천6백90억원으로 목표대비 76.9%에 그치고있다.

특히 12월들어 자금시장이 경색되고 금리가 25%대로 폭등하면서 남은 2천10억여원중 1천1백억원은 아예 조달이 불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중진공 관계자는 "최근 3백억원의 채권을 증권사를 통해 공모 형식으로 발행하려 했으나 채권시장이 난조에 빠져 그 절반인 1백50억원만 인수하는데 그쳤다" 고 말했다.

또 다른 정책자금인 협동화자금의 지원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경기도 파주의 나염사업협동조합은 11월 77억원의 협동화자금을 지원받기로 결정됐지만 은행이 추가담보를 요구하는 바람에 실제로는 아직 한푼도 지원받지 못하고 있다.

정책자금이 은행에 배정돼도 은행에서 대출이 안되는 경우도 적지않다.

국민은행과 기업은행 담당자들은 "시중 은행들이 국제결제은행 (BIS) 의 자기자본비율 기준 맞추는데 급급해 어음할인이나 신규대출이 막히면서 우리 은행으로 자금 요청이 몰린다" 며 "그러나 현재의 상황에선 담보를 잡더라도 대출은 어렵다" 고 말했다.

중소기업청이 관할하는 외화대출자금의 경우 급격한 환율상승의 여파로 아예 기능이 정지된 실정이다.

외화로 빌린뒤 외화로 갚아야 하는 이 자금은 환율 예측이 불가능한 요즘같은 때엔 쓰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인천에 있는 전자부품업체 S하이테크의 金모사장은 지난달 외화대출금신청자격을 스스로 철회했다.

전자부품가공에 쓰일 고정밀 연마기등 50만달러 상당의 기자재를 들여올 계획이었으나 환율이 1천원대를 훨씬 넘어서자 도자히 투자할 자신이 없었기때문이다.

올해 중소기업청이 국산기계 구입용 외화대출금으로 책정한 예산은 5천억원. 그러나 11월말까지 이 자금을 신청해 대출자격을 얻은 곳은 98개 업체 4백9억원으로 예산의 8.4%에 불과하다.

중기청 자금관리과 담당자는 "환율이 폭등하면서 업체들이 자금상환때의 부담을 고려해 대출받기를 꺼리는 바람에 실제 은행에서 이 돈을 받아간 곳은 42개 업체 1백여억원에 불과하다" 고 말했다.

홍병기·이승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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