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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포커스]한국·일본·미국 도산 게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지난 8월 하순 고촉통 (吳作棟) 싱가포르 총리가 도쿄 (東京)에 들러 자국을 포함한 아시아 금융시장의 불안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고 돌아갔다.

그리고 한달이 지나 태국의 차왈릿 총리가 다급하게 하시모토 류타로 (橋本龍太郎) 총리를 찾아왔다.

다시 한달을 채 못넘긴 지난주엔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 회원국인 한국의 임창열 (林昌烈) 부총리가 역시 외화 지원을 받기 위해 도쿄에 나타났다.

한국이 어업협상을 질질 끌어온데 대해 감정의 골이 팬 일본당국자들은 김영삼 (金泳三) 정권에 묵직한 부담을 안겨주는 외교적 찬스를 얻었다.

미국 눈밖에 벗어나 있는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나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정권도 그동안 여러 루트를 통해 일본에 긴급지원 신호를 보내왔다.

그러나 일본이 이른바 아시아 통화기금을 창설해 아시아를 '구제' 하려는 전략은 초반부터 삐걱거렸다.

미국의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이 아시아에서 엔화 경제권을 이끌어가는 일본 의도에 쐐기를 박았기 때문이다.

미국이 한국을 지원하려는 일본을 강도 높게 견제해 왔다는 소문은 이미 도쿄 외교가에 파다하다.

한국이나 태국.인도네시아 등에 국제통화기금 (IMF) 을 앞세운 미국의 길들이기 작전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4일 저녁 일본기자클럽에 모습을 드러낸 캉드쉬 IMF총재는 합의문 내용은 어디까지나 한국측이 만들어낸 프로그램이며 IMF측이 독선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합의문에 대해 3명의 대통령 후보와 국회의장까지 '지지' 를 보냈다고 일본 기자들에게 자랑했다.

일본 관료들은 미국의 아시아 전략상 큰 무기가 신용정보에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미국의 신용정보 회사들이 일본의 은행이나 특정기업의 평가등급을 몇 단계 낯추면 그 시각부터 사단이 벌어지는 일대 혼란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업살상적이며 상황에 따라서는 한 국가에 치명상을 주는 무기일 수 있다.

야마이치 (山一) 증권도, 다쿠쇼쿠 시중은행도, 닛산생명도 결국 신용평가등급이 떨어졌으며 투자가들은 예외없이 자금을 회수했거나 투자를 기피함으로써 기업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신용정보회사들은 특정국가나 기업의 경영내용에 대한 소상한 자료를 입수, 분석해 투자 적격여부를 판단한다.

그러나 거기에 정치.외교적 의도가 개재될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중국의 경제가 미국에 위협적일 때 또는 중국을 견제해야 할 정치적 상황이 도래했을 때 신용등급 하락이 미국의 적절하고도 유용한 무기일 수 있다는 가상 시나리오도 생각할 수 있다.

한국은 미국 외에 일본에 의해서까지 번번이 등급하락 판정을 받는 더욱 취약한 입장이다.

이제 기업의 도산을 어떻게 요령있게 처리할 것인가가 문제다.

일본 정부는 4대 증권사의 하나인 야마이치나 다른 시중은행 또는 보험회사의 사망선고를 내렸다.

경쟁력 없는 기업을 잘라내 일본경제 전체에 대한 파급을 최소한으로 줄였다.

그러나 한국은 기아자동차를 살리기 위해 정부가 무리하게 끌어안음으로써 문제를 확대시켰다.

일본 기업의 자유도 (自由度) 는 내부 개혁에 의해 더욱 높아지고 있다.

흑자 도산에 이어 보다 창의적이고 모험적인 기업들의 설립이 늘어나고 있다.

한국은 경제신탁통치에 의해 본격 개혁추진이 가능해졌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일본 기업은 시장경제를 이해하는 정치권과 언론의 뒷받침을 받고 있으며 그에 따른 사회적 비용의 절감액이 상대적으로 크다.

일본에선 은행 및 기업의 부실 경영이나 정책 당국자의 판단 오류에 대해서는 반드시 책임이 추궁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사실에 근거를 둔 논증이 앞서며 차후의 교훈으로 삼는다.

한국은 사실적 분석이 결여되기 십상이고 뒤처리가 모호하다는 지적을 받는다.

한국도 나름대로의 도산원칙이 정립되지 않으면 늘 미국의 시장경제 틀 안에서 움직이며 일본에 의지하려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 에 머무를 뿐이다.

최철주<일본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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