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 유래]종로구 서린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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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종로구 서린동 (瑞麟洞) 의 동명은 조선초 한성부중부 소속 8방중의 하나인 서린방의 방명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이곳은 도성의 중심지인 운종가의 남쪽에 위치, 상업이 발달했는데 도성안 시전 (市廛)가운데 규모가 가장 커 행세했다는 육의전 (六矣廛) 중 면포전.목전.지전.포전.내외어물전등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때문에 이곳에는 늘 돈이 돌아 조선말부터 일제때는 기생들이 많이 살아 기생촌을 이루기도 했다.

지금과 같은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일제때인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부터로 전옥동 (典獄洞).백목전동 (白木廛洞) 등 11개 마을의 각 일부를 합쳐 이뤄졌다.

특히 서린동154 광화문우체국 자리에는 상민들의 감옥인 전옥서 (典獄署)가 있어 고종때까지 운영돼 종각부근에 있던 의금부, 전옥서 옆에 있던 좌우포도청과 함께 공포의 장소로 여겨지기도 했다.

전옥서의 감방은 원옥 (圓獄) 으로 동쪽의 남옥 (男獄) 과 서쪽의 여옥 (女獄) 등 두개의 옥사가 있었는데 아랫쪽 절반은 두꺼운 판벽, 윗쪽 반은 빙지목 (憑支木) 으로 촘촘히 질러 공기가 통하도록 꾸며져 있었다.

강도등 흉악범실, 뇌물받은 관리.좀도둑.빚쟁이등의 옥사, 천주교도등 사상범이나 삼강오륜을 어긴 윤상범실 (倫常犯室) 등 죄질에 따라 세칸으로 나누어 수감했다.

또 지금의 광화문우체국 북쪽 종로통을 가로질러 혜정교 (惠政橋) 혹은 복청교 (福淸橋) 란 돌다리가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탐관오리에 대한 공개처형이 이뤄졌다.

처형방법은 팽형 (烹刑) 으로 온 백성들이 볼 수 있도록 다리 한복판에 임시 부뚜막을 만든 다음 물이 든 커다란 가마솥을 걸고 죄인을 삶아죽이는 처벌이다.

하지만 포도대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집행되는 팽형은 실제로는 죄목을 읽고 오라에 묶인 죄인을 가마솥에 들어가게 한뒤 불을 지피는 시늉만하는데 이때부터 죄인은 삶겨죽은 시체노릇을 하며 평생을 지내야했다.

살아있는 시체 (?) 는 꺼내져 가족들이 준비해온 칠성판에 실려 집으로 간뒤 장례까지 치뤄지고 호적에도 사망으로 기록되는데 생업에 종사할 수 있고 아이도 낳을 수 있으나 태어난 아이는 사생아 취급을 받아 '죽느니만 못한 삶' 을 살아야 했다.

말하자면 철저한 명예형인 셈이다.

오늘날 '국가부도' 로 온국민을 비참하게 만든 책임자들에게도 '상징적 팽형' 이나마 시켜보면 어떨까. 이만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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