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 칼럼]경제전문가들 사표써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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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북한이 남침을 시작한 6월26일 국회가 소집됐다.

조소앙 (趙素昻) 의원이 "어떻게 적의 남침을 이렇게 몰랐느냐" 고 따지자 채병덕 (蔡秉德) 총참모장은 "사태가 별것 아니다.

사흘안으로 평양을 함락시키겠다" 고 호언장담했다.

27일 밤, 몇시간 뒤면 서울이 점령당하는 위기일발의 순간에 대전으로 피난간 대통령은 전화로 녹음한 담화문을 통해 "유엔에서 우리를 도와 싸우기로 작정하고 공중으로 군기와 군물을 날라와 우리를 돕고 있으니 국민은 좀 고생되더라도 굳게 참고 있으면 적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니 안심하라" 는 태평스런 방송을 내보내고 있었다.

이 때문에 수많은 서울사람들은 적치하의 고생길을 헤맸고 수백만 젊은이들의 꽃다운 목숨이 전장에서 사라졌다.

지금 사정이 물론 당시와는 다르다.

그러나 진행되는 순서가 너무나 흡사하다.

불과 20여일 전이다.

미국 불름버그 뉴스의 빌 오스틴 기자가 '한국의 은행들은 확실히 위기상황이다' 라고 타전했다.

10월말 외환보유고가 3백5억달러라지만 실제 외환보유고는 1백50달러 수준이고 곧 국제통화기금 (IMF) 의 구제금융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보도를 했다.

곧 이어 미국과 홍콩의 중요 신문들이 한국경제의 위기를 보도하기 시작했다.

이때만 해도 재정경제원이나 한국은행의 고위 당국자들은 무슨 말이냐고 펄쩍 뛰었다.

문제의 기사를 쓴 기자에게 항의하고 외국언론이 한국경제 때리기에 나섰다고 흥분하면서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별렀다.

그 보름뒤 우리 경제는 두손을 들었다.

전선이 무너지고 적군이 전면전을 시작했다는 정보조차 사전에 알지 못한게 6.25 당시 우리의 한심한 군사전문가들이었다.

그러면서도 한번 진군하면 평양에서 점심 먹고 신의주에서 저녁 먹는다고 큰소리 쳤다.

국경없는 전쟁이 경제전쟁이라고 했다.

이 전쟁에서 전선의 어디가 터지는지도 모른 채 우리 경제는 '펀더멘털 (fundamental) 이 튼튼하다' 느니, 거시경제지표가 어떻고 저떻고 하면서 마치 6.25 당시의 총참모장처럼 우리의 경제전문가들은 그동안 흰소리만 쳐왔다.

하루아침에 부도국으로 주저앉은 우리의 추락도 통탄스런 일이지만 나라꼴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도 책임질줄 모르는 이 후안무치한 경제관료.경제전문가들의 태평스런 풍토가 더 개탄스럽다.

6.25 당시 군대란 얼기설기 엮은 창군 2년째 걸음마 단계의 조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건국 50년을 맞는 문민정부 시대다.

이른바 엘리트관료란 다 모여 있다는 곳이 재경원이고 그 밑에 숱한 경제연구단체가 있어 밤낮으로 무슨 세미나에 국제회의 한답시고 으스대며 돌아다닌게 그들이다.

여기에 이름깨나 있는 경제학교수들이 줄지어 정부관련 프로젝트를 따 연구하고 보고서를 내는게 지금까지 해온 그들 일이다.

도대체 이들은 무얼 했는가.

어째서 경제전선이 무너지고 외국의 구제를 받아야 하며 그 돈을 국민의 혈세로 갚아야 하고 수백만명의 목숨인 직장을 잃어야 하는 국난 위기가 오는지 어느 경제관료, 어떤 전문가 집단이 이를 미리 경고했고 이에 대한 대처방안을 제시했던가.

고통과 위기가 지금부터 시작인데도 구제금융만 받으면 당장 일어설 듯이 나발 부는게 이들이고 세 대선 후보 모두 자신이 집권만하면 위기는 잠재울 듯 큰소리 치고 있다.

개발독재 시절이라면 대통령이 이 모든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경제전문가들 스스로 외쳐댔던 자율경제에 정부규제 해체의 시기다.

위기상황을 미리 알고 경고하고 대처방안을 제시해야 하는게 바로 이들 전문가집단이 해야 할 일이다.

그들은 말할 것이다.

대통령이 무능하고 경제관료가 경직돼 있어 우리 소리를 듣지 않았다고. 대통령 귀가 어둡다면 귀를 잡아당겨서라도 전선이 무너지는 소리를 생생히 듣도록 일깨워 주는게 관료와 전문가 집단이 해야 할 최소한의 애국심일 것이다.

사흘후면 평양을 점령한다는 식의 장밋빛 청사진만 늘어 놓았으니 오늘의 국난을 맞은 것이다.

정치지도자만 중요한게 아니다.

대통령을 보좌하는 전문관료들.연구기관.교수.언론인 등 이른바 먹물먹은 전문가집단 모두가 제자리에서 제 일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전문성과 정직성, 그리고 책임질줄 아는 직업윤리를 발휘할 수 있어야 오늘의 국난을 이겨낼 수 있다.

권영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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