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어진 '구제금융'…배경·전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정부가 국제통화기금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로 방침을 굳힌 것은 최근의 해외차입 여건을 감안할 때 불가피한 선택이다.

여기저기서 해외차입이 끊어지면서 정부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환율이 급등했으며 급기야 정부가 부실 금융기관 대폭 정리와 개방 확대를 골자로 한 '11.19 금융시장 안정대책' 을 내놓았지만 너무 늦었다.

IMF구제금융은 한국은행이 일찌감치 유일한 선택임을 주장했고 강경식 (姜慶植) 전부총리와 김인호 (金仁浩) 전경제수석도 그 불가피성을 부인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김영삼 (金泳三) 대통령이 '집권기간중의 오점 (汚點)' 을 꺼려한 나머지 주저해 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姜부총리의 경질에도 불구하고 신임 부총리가 선뜻 IMF문제를 밝히지 못했던 것도 그런 맥락에서 해석된다.

그러나 현실적인 상황은 대내외적으로 IMF를 거치지 않으면 매듭이 풀리지 않게 전개돼 갔다.

이번주초 미국.일본등의 '실력자' 들에게 협조융자를 요청했지만 이들 국가는 한국이 IMF프로그램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에선 개별지원을 할 수 없다는 입장을 거듭 밝혔다.

물론 세계 11위의 무역대국인 한국의 금융위기는 주변국에 엄청난 파급효과를 미치기 때문에 그들로서도 외면할 수 없는 처지지만 표면적으론 미국은 의회에서 구제금융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난색을 표했다.

일본은 개별지원에 대해 다소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지만 미국의 견제에 부닥쳐 이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정부는 IMF를 통하는 쪽으로 방침을 굳히기에 이르렀다.

각국도 내심 혼자 위험을 떠안기보다 IMF를 통해 위험을 공동으로 부담하는게 낫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는 것 같다.

이들은 특히 IMF의 강력한 프로그램을 통해야만 한국의 구조조정이 효율적으로 이뤄지고, 빌려준 돈도 빠른 시일안에 돌려받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외국의 사례로 비춰볼 때 구제금융은 IMF가 지원자금의 일부를 내고, 세계은행 (IBRD).국제결제은행 (BIS).아시아개발은행 (ADB) 등 국제기구와 주변국들이 갹출하는 형태가 될 것이다.

구제금융에 따른 구체적인 요구조건은 정부의 공식 요청 직후 방한하는 IMF자문단과 정부가 협의해 결정하게 된다.

IMF자문단은 3~4주의 실사를 거쳐 지원규모를 결정할 전망이다.

지원규모가 결정된 뒤에도 돈이 한번에 지원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정부의 요구조건 이행과정을 지켜봐가면서 IMF가 지원시기를 결정하게 된다.

물론 이때 우리 정부가 IMF의 요구조건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을 경우 지원이 끊길 수도 있다. 요구조건으로는 ▶노동시장 유연성 제고 ▶성장률 하향조정 ▶재정긴축 ▶물가.통화 안정 ▶경상수지 적자 축소 ▶세율인상 ▶기업퇴출제도 정비 ▶개방확대 ▶공기업 민영화 ▶부실금융기관 정리등을 예측해 볼 수 있다.

이때 사실상 미국이 IMF를 주도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미국측의 개별압력도 적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예컨대 우리가 세계무역기구 (WTO)에 제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던 자동차산업에 대한 개방요구도 우려되고 있다.

따라서 IMF의 요구조건을 이행하려면 정부.금융.기업.가계등 모든 부문에 걸쳐 엄청난 고통이 수반될 전망이다.

하지만 반드시 부정적으로만 볼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고현곤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