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씨 판소리 동화 다섯권 완간…아름다운 우리말·역사·풍속의 보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2면

관념과 지성, 그리고 남도적 정서로 고집스레 본격소설만 써왔던 중진작가 이청준씨가 최근 판소리 동화 다섯권을 파랑새 출판사에서 완간했다.

옛사람들의 삶과 말놀림등을 오늘에 살리기 위해 '흥부가' '수궁가' '심청가' '춘향가' '옹고집 타령' 등을 동화형식으로 풀어낸 것. 그리고 지난 13일밤 인사동 한 음식점에서 명창 박계향씨와 함께 문학과 소리가 어우러진 출판기념회 한마당을 펼쳤다.

서울대 서우석 교수와 건양대 우찬제 교수, 한양대 정민 교수, 문학평론가 권택영씨, 소설가 이인성씨등 20여명의 지인들이 속속 모여들었고 고수 (鼓手) 김용기씨의 장단에 맞춰 호남지방의 지리와 풍수를 노래한 '호남가 (湖南歌)' 가 흐르기 시작했다.

소리가 전주.남원을 거쳐 화순.장흥을 떠도는 동안 이청준씨의 해설이 곁들여졌다.

"저렇게 소리꾼이 손짓.발짓을 하는걸 '발림' 이라고 하지. 노래가 아니라 이야기로 내용을 전개하는 건 '아니리' 라 하고…" 이씨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얼씨구' '좋다' 하며 제멋대로 추임새를 하던 사람들은 이윽고 "그렇게 잘 알면 직접 한 곡조 하시지요" 라며 이씨를 부추겼다.

하지만 그는 끝내 직접 곡을 뽑지는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소리를 들으며 자랐고 지금도 국악을 미칠 정도로 좋아하지만 가슴속에서 울렁거리기만 할 뿐 토해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소설가가 천직인지라 대신에 다섯권의 동화를 펴냈다.

이씨는 판소리가 초등학교 교실이나 TV프로그램에서 절개 굳은 춘향이나 마음씨 착한 흥부처럼 대충 권선징악이나 인과응보 같은 고리타분하고 재미없는 이야기로만 다루어지는 것이 안타까웠다고 한다.

옛시절 우리말의 아름다움 쓰임새나 우리 역사와 풍속.전설.산업.지리등이 모두 들어있는 보고가 판소리이기 때문이다.

이씨가 펴낸 판소리 동화들에는 그런 점들이 고스란히 살아 있다.

'춘향이를 누가 말려' 에는 양반과 상민의 차별로 시달려야 했던 민중들의 삶이 보인다.

춘향이를 만나고 싶어 애태우는 이도령을 상민인 방자를 통해 놀려대는 대리만족적 해학이 있다.

'심청이는 빽이 든든하다' 에는 끼니를 얻기도 어려운 심봉사가 대를 이어야 한다며 살림 꾸리기에도 정신이 없는 곽씨부인에게 아들 낳기를 강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가하면 사람들에게 시달리는 동물들을 보호하겠다며 회의를 소집한 호랑이가 배고프다고 멧돼지에게 새끼를 달라고 강요하는 모습을 세상사에 빗대 그린 '토끼야, 용궁에 벼슬 가자' 에서는 자라가 호랑이 다리를 물어 뜯어 버린다.

또 '놀부는 선생이 많다' 에서는 흥부가 신삼기.새끼꼬기.새각시 가마메기등으로 근근히 끼니를 잇다가 남의 매를 대신 맞아 돈좀 만지는가 했더니 그마저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는 당하는 서러움을 한바탕 웃음으로 풀어낸다.

그렇게 현실을 풍자하면서도 그저 한바탕 흥으로 풀어버리기도 하는 것이 판소리의 매력이라고 이씨는 강조했다.

장단과 박자의 형식이 있지만 시절에 맞게 분위기에 따라 자유롭게 달라지기도 하는 것이 판소리라는 얘기였다.

그래서인지 박계향씨의 춘향가에선 어느새 이도령의 이름이 이몽룡에서 김용기로, 이청준으로 바뀌어 불리고 있었다.

떠났던 이도령이 어사가 되어 돌아온 것처럼 판소리도 이씨의 동화로 돌아온 것이었다.

한국적 정서와 술 그리고 소리에 젖어 발개진 얼굴로 자리를 뜰 때쯤엔 밤하늘까지 촉촉해져 부슬부슬 가을비를 뿌리고 있었다.

양지열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