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수신경쟁에 은행 지점장들 허리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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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요즘 그 좋다던 은행 지점장은 허리가 휜다.

거액예금을 유치하기 위한 섭외활동이 지점장 업무의 태반을 차지하기도 한다.

수신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금주들도 이런 사정을 훤히 꿰뚫고 지점장들 위에 군림하려 한다.

중소기업 앞에서는 생사여탈권을 쥔 왕처럼 행세하는 지점장들도 이들 앞에서는 '토털 서비스맨' 이 된다.

특히 10억원 이상의 거액 전주 (錢主) 들에게는 꼼짝 못하고 허리를 굽힐 수밖에 없다는 것. 예금액수가 1백억원 정도에 이르면 '특별관리' 대상이다.

이 정도 전주라면 지점장을 종으로 부린다.

S은행 D지점의 지점장 L씨 케이스. 얼마전 "지점장도 더 크시려면 공부 좀 하셔야지" 라며 모대학 야간대학원에 진학하라고 권하는 거액 예금주의 전화를 받았다.

사양했더니 다음날 지점장실로 찾아와 "사실 내가 그 대학원에 들어가 학생회장으로 출마하려는데 좀 도와달라" 며 조르더라는 것. 거절하기 어려워 결국 지점장 판공비에 개인 돈까지 보태 2백40만원을 내고 등록했다.

시험을 봐야 한다고 손 놓은지 오래된 전문서적을 며칠밤이나 뒤적이기도 했다.

L씨는 첫날 학교에 나갔더니 자신과 같은 사정으로 마지못해 진학한 다른 은행 지점장 한명을 만나 서로 웃고 말았다고 한다.

거액 전주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지점장과 함께 있는 동안은 절대 자기 지갑에 손을 안댄다는 것. "설렁탕 한 그릇을 먹어도 절대 자기 돈은 안냅니다.

심지어는 식사 마치고 나오며 골프숍에 들렀는데 클럽 하나를 만지작 거리더니 쑥 뽑아들며 '이거 잘 맞을 것 같아' 라며 그냥 들고 나가는 거예요. 뭐라고 제지할 수도 없이 그냥 카드로 계산하고 나왔습니다." (서울 강남의 C은행 지점장) 수시로 일을 방해하는 것도 이들의 특성중 하나. 심심하면 한창 일이 바쁜 대낮에 "해도 긴데 고스톱이나 한판 칩시다" 라며 전화를 한다는 것. 혹시 또다른 예금주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나가보지만 오히려 무리한 대출청탁을 받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한다.

결국 야멸차게 뿌리치지 못한채 한두시간 패를 돌리며 10만원 정도 털리고 나와야 예금만기가 돼도 까탈없이 넘어간다는 것. 자녀.친인척 취직청탁은 이미 고전 (古典)에 해당한다.

요즘은 은행 감원바람이 다 알려져 좀 뜸하지만 1, 2년전만 해도 청탁이 줄을 이었다는 것. K은행 지점장은 올해초 '30억원짜리 고객' 의 딸 취직청탁을 거절못해 은행자회사 사무직 자리 하나를 간신히 만들어줬다.

경조사 챙기는 것은 기본이고 사고라도 생기면 풀서비스를 해주기도 한다.

또 다른 S은행의 한 지점장은 지난 95년 거액 예금주의 딸이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로 사망하자 은행일은 제쳐두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일주일 이상 현장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시신수습은 물론 보상금 받아내는 일까지 도맡아 해줬다.

철만 되면 뭉칫돈을 넣어주는 '기관' 의 자금담당자들에게 인사 도는 일도 빼놓을 수 없다.

연기금뿐 아니라 전기료.전화료 받아 잠시 예금으로 넣어주는 기관들도 주요 고객이다.

늘 상품권이나 갈비세트로 넘어갈 수 없어 일년에 한두번은 '봉투' 를 준비하기도 한다.

남윤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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