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서평]가상현실의 철학적 의미…컴퓨터속 가상현실의 역설 포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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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컴퓨터, 그 이상한 물체가 끼어들면서 세상은 가상현실을 둘러싼 논의로 뜨겁다.

지금까지 우리가 몸담고 살아온 현실은 그보다 더 생생하게 온몸을 전율하게 만드는 가상현실에 밀려 '증발' 될 위기에 처해 있다.

그렇지만 이 컴퓨터가 펼쳐보이는 새로운 현실은 어떤 존재론적 구조를 가지고 있고 어떻게 인간 존재를 변화시킬 것인가.

어쩌면 인간에게 가장 절박한 이 문제는 사색의 대상이 될 여유조차 허용되어 있지 않다.

광속 (光速) 만큼이나 빠른 컴퓨터의 발전 속도때문이다.

프리랜서 철학자인 마이클 하임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롱비치 해변을 거닐 수 있는 바로 그 여유 속에서 가상현실로 철학적 사색의 눈길을 보냈다.

그리고 그 사색의 결과를 날씬한 책으로 묶어냈다.

하지만 그 책은 '가상현실의 철학적 의미' (책세상刊) 란 무거운 제목을 달고 우리를 철학적 사유의 미궁으로 유혹한다.

제7장 '사이버 스페이스의 에로틱 존재론' , 철학적 감수성이 미약한 독자들도 뭔가 느낄 수 있는, 이 책의 클라이맥스이다.

여기서 하임은 육체의 사슬을 풀고 정신적 관념으로 상승해가는 플라톤적 에로스론과 SF작가 윌리엄 깁슨의 사이버 소설을 교묘하게 동침시킨다.

그리고 그 현장에서 저자는 관념적인 2진법으로 모든 것을 디지털화하는 가상현실이 존재로부터 물질과 육체를 벗겨내는 탈 (脫) 물질화.탈육체화 광경을 훔쳐본다.

이러한 광경을 하임은 극적으로 풀어낸다.

"둔중한 육신이 한때 성애를 은밀하고 불투명한 미스터리로 만든 적이 있다.

" 실로 성애의 황홀한 신비적 감격은 이 미스터리 속에서 흘러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컴퓨터의 가상현실은 육체를 2진법의 디지털 기호로 변환 처리하여 가상의 육체를 만들어 낸다.

"숫자의 형태로 컴퓨터에 들어간 정신은 육체를 조롱하며 비밀스런 애무의 쉼터까지 삼켜버린다.

" 하임은 결국 이런 폭로를 통해 그가 통찰한 세가지 사실을 외설적으로 읽어주고 있는 것이다.

즉 컴퓨터는 관념주의적인 플라톤 형이상학이 지속적으로 관철된 결과이고 탈물질화.탈육체화를 통해 세계의 미스터리가 추방됨으로써 조작과 지배의 욕망이 무한팽창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탈육체화에 의해 자아의 안식처가 상실되고 결국 자아와 인격의 동일성이 실종된다는 것. 과연 하임은 플라톤 이후 라이프니츠를 거치는 철학사를 추적하며 컴퓨터의 등장 과정과 탈물질화.탈육체화가 수반하는 가상현실의 역설을 포착한다.

그 역설은 가상현실이 자율성의 확대에 기여하는듯 하지만 사실은 자율성의 기반이 되는 자아를 궤멸시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체적 대면이 없는 가상사회에서는 도덕적 무관심이 증폭돼 사람들은 서로에게 '잠복자' 가 된다는 설명이다.

그리하여 하임은 말한다.

미래를 향한 가상현실에 필수적인 것은 '땅의 정기에 뿌리를 내리고 육체 인간들과 접촉하는 일' 이라고. 하임은 가상현실의 선구적 철학자로서 평가받을 만하다.

하지만 그에게는 가상현실의 존재론적 구조를 그것의 출현과 그 출현을 가능하게 한 배후원리와 관련시켜 통찰하는 집중력이 아쉬운 것이 흠이다.

이종관 교수〈성균관대·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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