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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S한국경제]2.무너진 '대마불사' 신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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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하루하루 살얼음을 딛는 듯한 경영위기 상황의 연속이었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회사를 위해 일해오신 임직원 여러분께 죄송스런 마음뿐입니다.

이런 결과로 이어진 경영책임, 비통한 심정으로 달게 받겠습니다…. " 올 7월초 3천여명의 한신공영 임직원 집에는 이런 내용의 편지가 날아왔다.

경영난을 못 이긴 한신공영 김태형 (金泰亨) 전회장이 법정관리 신청후 회사를 떠나며 자신의 심정을 밝힌 내용이었다.

이 회사의 몰락에는 한보사태 이후 얼어붙은 자금시장 탓도 있지만, 자신의 경영책임 또한 크다는 솔직한 고백이었다.

올들어 한보 이후 기아.진로.뉴코아와 최근의 해태에 이르기까지 30대 그룹중 여섯 곳이 무너졌다.

대농.쌍방울등 중견기업에까지 부도 신드롬이 확산되며 재계에는 "이제 대마불사 (大馬不死) 의 신화는 없다" 는 말이 굳어져가고 있다.

대기업이 망하면 우리 경제와 사회에 엄청난 부작용을 미치는만큼 정부가 나서서라도 대기업만은 어떻게든 살릴 것이라는 믿음이 이제 더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백일 이상 끌었던 재계순위 8위의 기아가 대표적인 케이스다.

전문가들은 최근의 기업부도에 대해 "쓰러지는 기업에는 나름대로 쓰러질만한 이유가 있다" 고 말한다.

한보는 정치적 이유가 컸지만, 다른 그룹들은 취약한 기초체력을 감안하지 않은 고질적인 성장 우선의 차입경영이 근본 원인이다.

기아등은 이자가 비싼 단기자금을 무리하게 끌어다 투자에 나선 것이 부실의 주요 원인이라는 지적이다.

시중은행의 한 임원은 이에 대해 "기업들은 신규사업을 시작할 때 사업계획부터 세워놓고 자금을 챙긴다" 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 경제가 저성장기로 진입하며 '차입경영' 은 이미 기업 생존을 위협하는 독소로 변했다.

삼성그룹 지승림 (池升林) 전무는 "우리 경제는 3~4년전부터 저성장기 진입 징후를 보였지만 대부분 기업이 70년대 고도성장기때의 패러다임을 버리지 못한게 실패의 원인" 이라고 지적했다.

외부 환경은 '저성장' 인데도 내부 패러다임은 '고성장' 을 고집한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기업들은 성장위주의 경영전략을 전면 수정, 이익 위주 경영을 저마다 강조하고 있다.

그룹마다 꼭 필요하지 않은 사업부문과 자산을 잘라내고 처분하는 구조조정을 추진중이다.

"모두 살리려다가는 다 죽을 수도 있다" 는 위기감 때문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30대 그룹 대부분이 올들어 ▶한계사업 정리 (22개 그룹) ▶부동산등 보유자산 처분 (19개) ▶인력감축및 재배치 (23개) 등 구조조정에 나서고 있다.

신호.삼천리등의 중견그룹도 구조조정 계획을 밝혔다. 대상 (前미원) 그룹 고두모 (高斗模) 회장은 "성장보다 생존의 과제가 더 절박한 시점인만큼 단순한 환경적응이 아닌 대변신이 요구된다는 자세로 구조조정에 나섰다" 고 말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현재 진행중인 구조조정이 실패할 경우 2000년대 잠재성장률이 1~2%선으로 떨어질 것으로 분석했다.

그러나 대규모 개혁에 성공할 경우 4~5%선의 견실한 성장을 이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구조조정 계획은 의욕과 달리 각종 규제에 묶여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는 것으로 지적된다.

부동산 투기 억제시책과 기업 인수.합병 (M&A)에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공정거래법등 각종 법률과 제도가 발목을 잡고 있다.

재무구조 개선에 필수적인 부동산 매각은 세제 문제로 상담조차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대우경제연구소 이한구 (李漢久) 소장은 "구조조정에 대한 인식은 돼 있지만 막상 실천은 잘 안된다" 며 "사업분야를 매각하려 해도 시장이 없고, 인력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철수할 방법도 없다" 고 말했다.

LG경제연구원 이윤호 (李允鎬) 원장도 "수익성이 낮은 부분을 떨어내려고 해도 세금이 문제되는 경우가 많아 구조조정이 쉽게 되지 않는다" 고 말했다.

정작 구조조정에 나서는 기업들이 정말 살아나려는 의지가 있는지 의심하는 눈초리도 있다.

다른 그룹에 앞서 구조조정에 나선 두산그룹 김철중 (金哲中) 상무는 "내가 내놓기 아까우면 남도 관심을 갖는 물건이다.

아쉬우면 돈이 되는 것부터 먼저 팔아야 한다" 고 말했다.

전경련의 손병두 (孫炳斗) 상근부회장은 "정부와 정치권은 기업이 생사를 걸고 추진하는 자구노력을 가로막는 관련법 개정안을 신속히 처리하고 발효시기도 앞당겨야 한다" 고 말했다.

또 어차피 쓰러질 기업을 무리하게 붙들어 국민경제를 멍들게 하지 말고 일찌감치 쓰러뜨림으로써 우리 경제의 건전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유규하.신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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