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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투기꾼 그들은 누구인가…1조2천억불 굴리는 '마이더스의 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8면

동아시아 금융위기를 주도하고 있는 핫머니의 공세에 대처하기 위해 외국계 은행.증권사의 지점마다 요즘 때아닌 인사바람이 불고 있다.

시티은행은 멕시코에서 근무했던 거물을 도쿄지점에 배치했다.

스미스 바니증권도 90년대초 중남미에서 핫머니의 공격을 경험한 베테랑을 홍콩.싱가포르 지점에 배치하고 있다.

일본 쓰미토모 (住友) 해상투자자문은 핫머니의 정체에 대해 "대표적인 것은 세계를 두루 돌아다니는 헷지 펀드" 라며, "헷지 펀드는 10년 전부터 활동이 왕성해졌으며 최근 규모가 급속도로 커지고 있다" 고 말했다.

전 세계에 1천여개의 헷지펀드가 1조2천억달러 (약 1천2백조원) 규모의 자금을 굴리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 1년치 예산의 두 배가 넘는 돈이 투기적으로 움직이는 셈이다.

역사상 세계를 도는 돈이 지금처럼 넘쳐나는 경우는 없었다.

미국의 경우 경기활황세를 타고 생겨난 엄청난 여유 자금이 실물경제 (기업)에 들어가지 않고 통화와 주식.상품 등으로 몰리고 있다.

헷지 펀드를 직역 (直譯) 하면, '사기도 하고 팔기도 하면서 위험을 회피 (최소화) 하는 펀드' 이지만 지금은 의미가 달라졌다.

선물.옵션등 파생금융상품의 복잡한 거래를 통해 '사도 이익, 팔아도 이익을 남기는 이익 극대화' 를 지향하고 있다.

도쿄미쓰비시 (東京三菱) 은행의 한 관계자는 "이들의 수법에 비하면 주가조작은 어린애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고 자조한다.

'고위험 = 고수익' 원칙에 따라 돈을 움직이는 대표적인 인물이 조지 소로스. 소로스의 펀드들은 국경을 넘나들며 자유롭게 움직이지만 그렇다고 닥치는 대로 투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우선 비밀 유지를 위해 출자자 숫자를 엄격히 제한하고 막강한 정보수집력과 치밀한 판단을 무기로 먹이감을 찾아 나선다.

경제에 무엇인가 무리가 있지만 표면적으로 평온한 지역을 포착,치밀한 현장조사를 하고 변화의 씨앗과 충격효과등을 면밀하게 계산한다.

그리고 승산이 있다고 판단되면 잠행을 시작한다.

투기라기보다 차라리 게임이라는 표현이 적당하다.

이들이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곳은 파생금융상품이 주무대인 버추얼 머니 (Virtual Money.가상 자금) 의 세계. 복잡한 파생금융상품의 폭발적 거래가 이뤄진 뒤에야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대부분 펀드가 손에 들어온 자금을 갖고 투자처를 찾아 나서는 것과 달리 헷지 펀드는 예컨대 1백억달러가 모이면 그것을 종자돈으로 삼아 버추얼 머니의 세계에서 5배, 10배로 자금을 부풀려 승부에 나선다.

지난 5월부터 헷지펀드들은 동남아 통화거래에 집중적으로 매달렸다.

맨먼저 태국의 바트화가 폭락할 것이라고 보고 바트화를 파는 대신 대량의 선물매도 공세를 펼쳤다.

대략 1백50억달러가 동원되자 시장이 작은 태국은 손을 들고 변동환율제를 채택했다.

요즘은 헷지펀드 뿐만 아니라 은행.증권.연기금등 돈을 가진 기관투자가들은 누구라도 투기꾼이 될 수 있다.

바트화의 경우 외국의 은행.증권사들도 달라붙았다.

헷지펀드들은 거액의 연봉으로 채용한 신입사원들에게 실전을 방불케 하는 도상연습을 시켜 '작은 호랑이' 로 키운 다음 점차 규모를 늘려 실전 (實戰)에 나서게 한다.

통화폭락의 모든 책임을 투기꾼에게만 돌릴 수는 없다.

핫머니는 큰 변화가 있을 법한 곳에 모이기 마련이다.

거품경기에 춤추고 실물경제의 모순을 방치한 각국의 정부에도 절반의 책임은 돌아간다.

잘못된 금융정책이 핫머니의 공격을 부르고, 그 결과 경제전체가 황폐화될 위험이 상존하는 것이다.

홍콩은 지난해말 헷지펀드의 움직임을 감시할 기구를 설치하는 등 상당한 준비를 갖춰놓았다.

그래서 지난달 국제투기꾼들의 공격이 시작되자마자 금리를 올리고 거액의 보유외화를 풀며 방어에 나설수 있었다.

그러나 핫머니의 공격을 끝까지 이겨낼 지는 아직 장담하기 이르다.

최근 홍콩 금융시장이 흔들리자 일본에도 공포감이 확산되고 있다.

일본의 최대 고민은 국제투기꾼들과 맞서 싸울 전문가들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일본 금융기관들이 외국 금융전문가를 스카웃하고 해외의 대형 증권사와 제휴를 맺는 등 대비책을 서두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도쿄 = 이철호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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