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 1조 달러 청소해도 위기 안 끝난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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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호 30면

미국 정부가 금융권의 독성 폐기물(부실 자산) 제거에 나섰다. 1조 달러까지 투입할 예정이다. 은행 등 금융회사 대차대조표를 깨끗하게 만들어 돈이 돌도록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는 단기적인 효과에 그칠 가능성이 있다. 미 재무부가 독성 폐기물 청소에 뛰어든 순간 1조 달러 이상이 추가로 부실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디서 새로운 부실이 발생할까? 금융회사의 부외(簿外)거래다. 이는 금융회사의 재무제표에 정식으로 올리지 않아도 되는 거래다. 출자나 지급보증 형태로 부담을 짊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굳이 본사 대차대조표를 통해 밝히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다.

거품 시절 월스트리트 금융회사들은 구조화투자회사(SIV) 등을 경쟁적으로 설립했다. 이들은 파생상품 등을 활용해 머니게임을 위해 설립된 자회사들이다. 이들이 모여 이른바 그림자 금융시스템(Shadow Financial System)을 이루고 있다. 여기서 손실이 발생하면 SIV를 설립했던 금융회사들은 지분율만큼 손해를 떠안아야 한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와 씨티그룹·JP모건·웰스파고 등이 설립하거나 참여한 SIV들의 자산 규모는 2008년 말 기준 5조2000억 달러에 이른다. 이 자산이 쓰레기로 전락해 BOA 등 4개 은행이 1조 달러를 떠안아야 한다면 금융 시스템 정상화는 물거품이 될 수 있다.

부외거래는 또 있다. 상업용 부동산을 담보로 빌려준 자금에서 신용카드 채무, 자동차 할부금 등까지. 하나하나 들먹이며 설명하기 벅찰 정도다. 금융회사들이 이 자산을 섞고 다시 분류해 부채담보부증권(CDO) 등을 만들어 펀드들에 팔아먹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를 처리했던 메커니즘과 같다. 씨티그룹은 이렇게 신용카드 채권 등 920억 달러어치를 처리했다. JP모건은 700억 달러에 이르고 BOA가 1140억 달러에 달한다. 웰스파고는 아직 정보를 공개하지 않았으나 JP모건처럼 700억 달러 선은 될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자산이 모두 부실화할 것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최근 신용카드 연체율이 급등하고 있다. 상업용 부동산 담보대출의 부실 비율도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 상업용 부동산 가격이 30~40% 더 추락해 제2의 서브프라임 사태를 야기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조만간 미국은 회계 규정을 개정할 예정이다. 그렇게 되면 금융회사들은 부외거래 메커니즘을 활용해 벌인 거래를 자사 회계 장부에 올려야 한다. 모든 자산이 부실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부외거래로 분류된 자산이 햇볕 아래로 드러나는 것 자체가 금융회사 대출을 제한할 수 있다. 요즘 은행들이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 등을 맞추기 위해 대출 자산을 최대한 줄이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외거래 말고도 복병은 또 있다. 미 국책 모기지회사인 패니메이나 프레디맥이 지급보증하지 않은 주택담보대출이 금융회사 장부 곳곳에 들어 있다. BOA의 장부에 남아 있는 이런 자산은 무려 1380억 달러에 이른다. 다른 은행들도 비슷한 규모의 무보증 주택담보대출을 안고 있다. 집값이 폭락해 담보가치가 의심스러운 마당에 정부의 지급보증마저 없는 이런 자산은 한순간에 부실화할 수 있다. 2차 금융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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