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다윈의 편지 ⑦ 부족함 없었던 삶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7면

다윈의 외가이자 처가인 웨지우드 가문은 명품 도자기 ‘웨지우드’로 막대한 부를 일군 집안이다. 그림의 오른쪽 나무 아래 앉은 이들은 다윈의 외할아버지 조시아 웨지우드 1세와 외할머니 새라다. 말을 탄 여성이 다윈의 어머니인 수재나.


결혼을 할 때는 장인과 아버지로부터 제법 큰돈을 받았다. 샐롭 카운티의 기록보관소에는 다윈과 부인 엠마의 결혼과 관련해 35쪽에 달하는 재정 보증 문서가 남아 있다. 다윈의 아버지와 장인이 사인한 문서다.

1838년 12월 31일 작성된 이 문서에 따르면 아버지가 1만파운드, 장인이 5000파운드를 신혼부부의 생활을 위해 신탁했다. 자금관리는 다윈의 형 이래즈머즈 다윈과 엠마의 오빠 조시아 웨지우드 3세가 맡았다. 이 돈을 투자해서 얻은 이익은 연간 4%인 600파운드에 달했다.

다른 시대의 화폐 가치를 비교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다윈 부부가 평생 걱정 없이 사는데 이 돈 만으로도 충분했다.

당시 다윈의 집에서 일하던 집사가 1년에 25파운드를 받았고, 전문직에 종사하는 중산층의 수입이 200파운드 남짓했다. 절대 가치로 환산해보면 다윈이 살던 시대의 화폐 가치는 평균적으로 지금의 70배 가량 된다. 다윈이 결혼할 때 받은 종잣돈은 우리 돈으로 20억 원이 넘는다. 그 투자 수익과 다른 수입을 합해 다윈은 이미 1년에 1억5000만 원 이상을 벌었다.


다윈은 재테크에도 소질이 있었다. 아버지가 미리 물려준 유산으로 40만 평에 달하는 농장을 구입해 상당한 임대 수익을 올렸던 ‘링컨셔 시골 지주’였고, 운하와 철도 주식에도 투자했다. 부동산과 주식에 적당히 나누어 포트폴리오를 구성한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아버지가 세상을 뜬 1848년에는 4만5000파운드를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이때부터 수입이 급격히 늘어나 1년 수입이 우리 돈으로 5억 원에 육박했다. 보통 한 해에 얻은 수입의 절반은 다시 투자했다.

다윈이 『종의 기원』 초판과 재판을 팔아 얻은 인세 수입은 616파운드 13실링 4 페니. 적지 않은 수입이지만 다윈이 저술로만 먹고 살았다면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다윈과 엠마 사이에는 흥부만큼이나 많은 아이들이 있었다.

주일우 ‘문지문화원 사이’ 기획실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