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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특수 수사의 원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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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2002년 4월 8일 미국 최대의 증권사 메릴린치 직원들이 일제히 일손을 멈추고 TV로 모여들었다. “이건 폭탄 테러야.” 누군가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TV에선 뉴욕주 검찰총장 엘리엇 스피처의 긴급 기자회견이 생방송되고 있었다. 스피처는 이날 메릴린치 애널리스트들이 주고받은 e-메일 내용을 공개했는데, 고객에게 추천했던 주식들이 증권사 내부에서 ‘쓰레기’라고 불리고 있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이 기자회견 후 메릴린치가 배임 혐의를 인정하고 1억 달러 이상의 벌금을 내기로 합의하는 데까지 두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정치권의 압력이 예상되자 전광석화 같은 기자회견으로 거대 기업의 무릎을 꿇게 만든 것이다. 조직 범죄나 부정부패를 파헤치는 특수 수사에서 타이밍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 사례다.

일본 최고의 특수 수사통으로 꼽히는 요시나가 유스케(吉永祐介) 전 검사총장(검찰총장)에게도 나름의 수사 원칙이 있었다. 그는 1976년 도쿄지검 특수부에서 록히드 사건을 수사해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전 총리를 구속시킨 인물이다.

요시나가 수사의 특징은 자백을 받는 방식에 있었으니, 조사실의 피의자가 스스로 입을 열 때까지 몇 시간이고 기다렸다. “받은 돈이 100만 엔 아니냐?”며 자백을 끌어내는 대신 “당시 상황을 잘 기억해 보라”고 해서 피의자 자신이 사실을 털어놓게 했다. 또 수사 검사들이 조사한 내용을 서로 알려주거나 상의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 모든 노력은 재판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자백을 유도하면 수사하긴 편하지만 재판에 들어가 뒤집히기 쉽다. 검사들이 서로의 조사 결과를 모자이크처럼 짜맞추다 보면 사건의 진상과 딴판인 그림이 나올 수 있다. 요시나가는 검찰에 불리한 증거도 들여다보고, 그래도 ‘유죄’라는 확신이 들 때만 본격 수사에 나섰다. 숱한 정치인을 법정에 세웠으면서도 역풍에 부딪히지 않은 이유다.

‘박연차 리스트’ 수사가 진행 중이다. 얼굴과 직함만 바뀌었을 뿐 신물 나게 봐왔던 혐의 내용들이고 구속 장면들이다. 그간 갖가지 리스트 수사가 거듭됐음에도 부패가 줄지 않는 이유는 뭘까. ‘재수 없어서, 밉보여서 우리만 들킨 것’으로 여기기 때문 아닐까.

검찰은 이번 기회에 ‘검은돈’을 받으면 반드시 꼬리가 잡힌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의욕도 중요하지만, 수사하는 과정에 작은 문제라도 없는지 치밀하게 따져 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박연차 수사가 스피처의 박력과 요시나가의 냉정함으로 대한민국의 특수 수사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권석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