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일시적 관계'의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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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일전에 한 외국인을 만났다.

71년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한국에 온 그 미국인은 한국 사람이 좋아 아예 눌러앉아 지금까지 4반세기가 넘게 살아오고 있는 이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그는 "최근 들어 한국을 사랑하던 외국인들이 속속 떠나가고 있다" 는 말을 꺼냈다.

근무 연한이 다 돼 떠나가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거개가 20년이 넘는 장기체류자들인데 그 가운데는 무려 지난 65년부터 살아온 이도 들어 있다고 했다.

자리를 함께 했던 한 한국인이 "한국이 이젠 잘 살게 돼 매력이 없어진게 아닐까요" 하고 반문하자 그 미국인은 고개를 힘차게 내저었다.

그 반증으로 30년이 넘게 살아 왔던 분은 인품도 훌륭한 교육자였는데 서울을 떠나면서 새로 희망한 부임지가 독일이었다는 것이다.

얘기 끝에 그는 심지어 한국이 너무 좋아 모국 (母國) 을 버리고 한국을 택했던 이들 가운데도 "귀화가 성급한 결정이었다" 며 후회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털어놓았다.

한국을 떠나가는 이유는 명백했다.

지난날 우리가 가지고 있던 좋은 덕목 (德目) 들은 스러져가고 좋지 않은 요소들만이 그 자리를 대신해 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이들을 절망시킨 것은 인간관계의 변화였다.

"요즘 한국 사람들의 인간관계를 보면 '일시적인 관계' 뿐입니다.

필요할 때만 관계를 맺고 친숙한 체하고 지내다가 필요 없어지면 언제 그랬느냐는듯 냉랭해지지요. "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고개가 끄덕거려졌다.

우리 주위에서 일시적인 관계를 찾기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닌 까닭이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일시적 관계의 시대' 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부부관계만 해도 그렇다.

80년만 해도 스무 쌍중 한 쌍 정도이던 이혼율이 95년에는 여섯 쌍중 한 쌍이 갈라설 정도로 늘어났다.

이런 속도라면 머잖아 세 쌍중 한 쌍이 이혼하는 미국을 따라잡을 듯하다.

문제는 너무 쉽게 이혼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신혼의 단꿈이 채 깨기도 전인 결혼생활 1년 미만의 이혼이 놀라운 속도로 늘어가는 것은 물론 심지어 '어찌될지 모르니…' 하는 속셈으로 혼인신고를 서두르지 않는 신세대 부부들도 드물지 않은 실정이다.

뿐이랴. '직계가 아니면 다 남' 이라는 인식도 팽배해져 있다.

서로에게 뭔가 보탬이 되는 관계가 아니라면 사촌마저 남이라고 여기는 세상이다.

한 핏줄을 타고났다는게 더 이상 서로를 묶는 끈이 되지 못한다.

더욱이 제주도 등 관광 유원지에 나이 든 부모를 몰래 버리고 떠나는 '현대판 고려장' 까지 떠올리면 이젠 부모 - 자식의 관계마저 한때 뿐이라고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직장생활도 마찬가지다.

방만한 기업 운영의 폐해를 줄이기 위한 구조재조정이 필연적으로 불러온 명예퇴직.조기퇴직 바람은 직장이 정년까지 평생을 보장받는 곳이 아니라 잠시 머무르다 가는 곳임을 확인시켜준 셈이 됐다.

게다가 심야에 운전해본 경험자들은 "한밤중엔 교통신호마저 없다" 고 입을 모은다.

중앙선.교통신호와 같은 자신의 생명과 직결된 규칙들마저 자신의 편의에 따라 멋대로 변경시키는 '일시적 관계' 가 돼버렸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몇달째 엎치락뒤치락하며 국민들의 질타를 받고 있는 정치권의 분열 - 통합도 따져보면 이같은 우리들의 생활문화가 만들어낸 '일시적 관계' 의 소산이 아닐는지. 미국의 교육심리학자 윌리엄 글래서는 교육의 효과를 이렇게 분류한 바 있다.

▷읽는 것 10% ▷듣는 것 20% ▷보는 것 30% ▷보고 듣는 것 50% ▷다른 사람과 함께 토론하는 것 70%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것 80%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것 95%. 생각하는 것만으론 잘못돼 가는 생활문화를 바꿀 수 없다.

다른 이들을 비난하기 전에 내 주변의 이기적인 '일시적 관계들' 부터 청산하도록 하자. 서로 믿고 도와가는 세상이 될 수 있도록.

홍은희 생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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