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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진행 '열차시회'…못잊을 '詩月 의 마지막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1면

주말여행을 떠나는 젊은이들의 흥분이 들썩거리는 10월 마지막밤의 서울 청량리역 광장. ‘열차詩會’라고 씌어진 커다란 깃발 아래 하나 둘씩 사람들이 모여든다. 이들의 정체는 묘하다. 화가·시인·소설가가 눈 인사를 주고 받는가 하면,샐러리맨이 명함을 건네며 통성명을 한다. 40줄의 주부도 여럿이다. 중년의 문화모임? 하지만,초등학생부터 20대를 지나 노인까지,나이도 들쭉날쭉이다.

이렇게 만난 70여명은 기차에 올라 한칸을 점령한다. 묵묵히 열차는 떠난다. 객차 마디에 걸터앉아 바라본 가을하늘엔 별이 촘촘하다. 이들은 태양을 만나러 정동진역으로 가는 것이다. 철길과 백사장과 파도가 나란히 늘어선 동해의 간이역.

몇시간 전,지친 기색을 내비치며 도심 뒤로 넘어가는 저녁 해를 배웅했다. 태양은 서(西)로 달리고,그들은 동(東)으로 내달아 바다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레일 위에,모든 걸 털어내기로 했다. 격정과 욕망과 한숨,우리의 가슴을 누르고 있는 일체의 짐들을 벗어던지자고 의기투합했다.

‘일 저지르기’를 주도한 건 문화를 사랑하는 모임인 ‘빈둥 클럽’. 주변의 동지들을 끌어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찾아 떠나자”고 부추겼다. 시를 만들기로 했다. 읽자고도 했다. 시심(詩心)이 엷어져 가는 이 세월을 오늘 하루 깨뜨려버리자고….

기차의 속도가 빨라진다. 열차가 레일 위에서 절룩거릴 때마다 별들도 비틀댄다. 객차 안에선 사람들이 휘청이기 시작한다. 자정이 지난 시간의 반란. 이들은 기다란 열차에서 한량을 배어내 점령군의 세상으로 만든다. 술은 이미 거나하게 돌았다. 점잖은 노신사가 파이프 담배를 문다. 독한 연기가 방안을 메워나가지만 이미 모두가 한 패다. 그들만의 규칙과 법은 모든 일탈을 감싸안는다.

연극배우 심철종씨의 퍼포먼스가 시작된다. 그가 은박지로 얼굴과 머리를 감싸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시선은 기다란 통로를 뚫고 일제히 쏠린다. 에디트 피아프의 끈적끈적한 목소리가 “파담 파담 파담”을 속삭이는 가운데 손가락이 부르르 떨리며 쿠킹 호일을 뜯어낸다. 노래가 끝나고 그의 파르스름한 맨머리가 드러나자 박수가 터져나온다. 메시지를 이해하고,못하고는 중요한 게 아니다. 새로운 공간에 새로운 시간을 꾸렸다는 감격이 벅차다.

배우도 절제하기 어려운가 보다. 그는 커다란 손짓으로 박수를 치며 ‘우린 구르네’라는 그의 ‘십팔번’을 토하기 시작한다. “우린 구르네/멋대로 우린 굴러가네/아무 죄 없어도. ”발을 쿵쿵 구르며 좁다란 복도를 지나갈 때마다 경기장처럼 박수의 물결이 일어난다. 이윽고 그는 완전히 둘러싸인다. “우린 또 굴러야 하네/누가 뭐라고 해도/우린 또 굴러야 하네. ”

손뼉에 포위된 그의 격렬한 몸짓은 집시의 축제를 떠올리게 한다. 아코디언과 바이올린의 연주를 따라 빙빙 돌아가는 유랑민의 애수를….

여기에 체면 따위의 껍데기는 없다. 여류시인들은 고상한 이름을 던지고 ‘아줌마’가 되길 자청한다. 민요와 유행가를 합창하고 몸을 흔들면서 잠든 철로를 깨운다.

단 한명의 이방인-친구를 따라온 독일인 하인츠 유르겐 베르바인이다. 한동안 ‘독일사람’처럼 앉아 있던 그는 새벽 두시를 넘기며 한통속이 된다. 술잔이 돌아간다.

가슴속에 묻었던 열정과 낭만을 거의 쏟아낼 즈음,그래서 차차 저항의 함성이 잦아들 무렵,열차는 목적지에 닿는다. 동행자들은 미명의 정동진역 백사장에 모여 해를 기다리며 시를 읽는다.

‘우리는 지금/이세상을 떠나간다/기차를 타고/칙칙폭폭/해뜨는 시의 나라로/빛나는 목숨의/붉은 천국으로 돌아간다. ’(조해인의 ‘해뜨는 풍경’중에서)시는 어렵지도,관념적이지도 않다. 같은 마음을 담고 마찬가지의 밤을 뚫고 달려온 이들로선 쉽게 쓴 시에 감동을 함께함이 마땅할 게다.

해가 돋는다. 온 세상의 낮을 이끌고 이제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난 태양에게,배우는 다시 몸짓을 연기한다. 해는,한번도 본적이 없는 밤의 역사를 구경한다. 이번엔 음악이 감상적인 바로크 선율,파헬벨의 ‘캐논’이다. 비로소 사람들은 은박지가 상징하는 도시와 억압을,알머리가 표현하는 자연과 자유의 심상을 알 것 같다. 몇몇의 눈과 입에서 울음이 터진다. 해는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고,반란은 끝-.

이제 그들은 허기를 채우고,서(西)로 서(西)로 달려갈 것이다. 해를 따라서.

동해=강주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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