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메랄드 궁전의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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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이예린?” 입을 벙긋 벌리며 그는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더이상 아무말도 꺼내지 못한 채 휑하니 깊어진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나도 그를 내려다보며 더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와 나 사이에서 어긋나고 빗나가던 모든 얘기가 결국 이예린이라는 존재를 귀결점으로 삼게 된 것이었다.

예정된 모든 길의 막바지, 그리고 운명적인 귀납을 예감케하는 결정적인 지점에 그와 나는 이르러 있었던 것이다.

“이예린… 그래요, 그것 때문에 왔다고 할 수 있죠. 어제의 얘기가 오늘로 이어지고 오늘의 얘기가 내일로 이어지는 것처럼, 형과 나 사이에서 아직 이예린의 얘기가 마무리되지 않았으니까요. 어젯밤에 내가 했던 말들, 행여라도 술에 취해 꺼낸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러니 계속 말해봐.” 테라스와 실내를 가름한 문틀에다 비스듬하게 등을 기대고 나는 말했다.

“솔직히 말해, 다른 건 없어요. 그녀와 사귀고 싶다는 거죠. 이미 말했지만, 그녀를 보던 첫 순간에 난 이상한 흡인력 같은 것에 사로잡혀버렸어요. 그런 느낌 형도 알잖아요. 느닷없이 영혼에 불침을 맞은 듯한 기분 말이에요.” “……” “사실 난 요즘 무척 힘들어요. 그리고 누군가, 내 영혼의 기착점으로 삼을 만한 대상을 꽤 오래전부터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어요. 그런데 그녀가 나타난거예요. 하지만 처음에 난 내 자신을 의심했어요. 왜냐하면, 내가 일상적 외로움에 너무 지쳐서 내 감정을 잘못 판단한게 아닌가, 그런게 못미더웠던 거죠. 그렇지만 지금은 그런 일시적 감정이 아니었다고 분명하게 말할수 있어요. 그녀를 만나면 모든게 달라질수 있을것 같다는 기대감과 설렘…그런 게 내 피를 뜨겁게 만든다는 거죠.” 눈을 가늘게 뜨고 그는 사뭇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말이 다른 거 아냐? 아니 지금의 그런 표현, 오기욱의 인생관에 위배되는 감정 아니냐구. 좀전에 말한대로 하자면 사랑이나 여자에 대해 오기욱은 아무런 가치 부여도 하지 않고 세상을 살아간다고 봐야 할 텐데, 도대체 어떻게 해서 그렇게 유치하고 감상적인 감정이 생겨날 수 있는 거지?” 팔짱을 끼고 비아냥거리듯이 나는 물었다.

“나도 모르겠군요. 이렇게 맹목적으로 절박한 감정을 느껴보긴 나도 처음이에요.” “처음이 아니라 매번 이런 식으로 시작한 거 아닌가? 그리고 이 여자도 별다른 게 없구나, 하는 걸 깨닫게 되면 아까와 같은 인생관이 또다시 자신을 압도하게 되는 고질적인 악순환 말야. 그래서 쉽게 포기하고, 그래서 또다른 대상을 찾고 싶어하는 병적인 애정 결핍… 난 아주 오래전부터 그런 걸 지켜보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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