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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비즈] ‘연탄박사’ 손무룡 대성산업가스 부회장 어제 퇴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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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국내 에너지업계의 산증인인 손무룡(73) 대성산업가스 부회장이 23일 서울 관훈동 대성그룹 사옥에서 퇴임식을 열고 47년간의 직장 생활을 마무리했다.

‘연탄박사’로 불리는 그는 연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1962년 경북대 화학과 조교로 일하던 중 대성연탄(현 대성그룹)과 인연을 맺었다. 대구상고 선배이자 대성의 창업주인 고(故) 김수근 명예회장이 “평생을 나와 같이 보람된 일을 해 보자”고 제안한 게 계기였다.

주위에서는 “왜 대학 강단 대신 연탄공장에 취직하느냐”고 만류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연탄회사 연구소를 택했다.

그는 “기업은 국민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좋은 제품을 싸게 공급해야 하는데 당시에 연탄사업은 이런 뜻에 맞는 사업이었다”고 회고했다.

손 부회장은 연구실장으로 재직하며 연탄가스가 새는지 미리 알 수 있는 ‘가스 발견탄’을 개발했다. 73년에는 ‘국산 무연탄의 연소반응기구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으로 경북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때부터 ‘연탄박사’라는 별칭을 얻었다. 이듬해에는 38세의 젊은 나이로 대성산업 최연소 이사로 선임됐다. 그의 학구열은 멈추지 않아 박사 학위를 딴 뒤부터 최근까지 모두 9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연탄가스로부터 사람을 구해야겠다는 신념이 작용했죠. 당시 신문에는 겨울이면 연탄가스 중독사고 기사가 교통사고 기사보다 자주 등장했거든요.”

연탄시대가 저물자 그는 발 빠르게 산업용 가스산업으로 눈을 돌렸다. 70년대 오일쇼크를 거치면서 김 명예회장과 신규 사업을 찾다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는 남은 직장 생활을 이 부문에 ‘올인(다 걸기)’하기로 했다. 산업용 가스는 초저온 기술을 이용해 공기를 액체로 만들어 저장한 뒤 LCD·반도체 제조, 석유화학 등에 사용된다.

“70년대에 일본에 가 보니 액체산소 소비량이 한국의 200배가 됐지요. 산업화가 진행될수록 액체산소의 수요는 더 늘어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국내엔 이와 관련된 기술이 전혀 없었다. 외국 기술에 의존해 공장을 세워야 했다. 현재 그룹 총수인 김영대 회장과 함께 프랑스의 저온공학 기업과 합작을 추진했다. 80년 결국 국내 첫 액화산소공장을 설립했다.

하지만 프랑스사로부터 기술을 하나도 전수받지 못했다. “합작사에서 영업 노하우만 알려줄 뿐 공장 설비나 제조 기술은 철저히 보안으로 해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그는 스트레스로 쓰러져 석 달 동안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이런 경험은 오히려 약이 됐다.

그는 악착같이 연구개발(R&D)에 매달렸다. 89년 국내 최초로 최저온연구소를 설립했다. 이 연구소는 100여 건의 가스 기술을 자체적으로 개발하고 20여 건의 특허를 보유하고 있다.

그는 영어·일본어·러시아어로 돼 있는 초저온 공학 관련 원서 3000여 권을 지니고 있다. 그는 “회사 설립 당시보다 현재 생산 능력은 186배, 매출액은 297배나 성장했다”며 “앞으로도 발전 가능성이 큰 초저온 공학을 공부하는 후학이 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문병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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