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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대통령,'85년 원폭보유' 계획 세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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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은 미국의 완강한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85년 원자탄 보유를 목표로 핵무기 개발을 극비리에 추진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朴대통령은 또 핵폭탄 제조에 필요한 플루토늄 추출을 위해 76년초 핵연료 재처리사업을 '화학처리대체사업' (일명 핵연료 국산화사업) 으로 이름을 위장, 미국의 감시에서 벗어나려 했으며 83년 이 사업을 완성하려고 했음이 확인됐다.

지금까지는 80년대초 핵무기 보유설등이 루머 수준으로 흘러 나왔으나 중앙일보 '실록 朴正熙시대' 특별취재팀에 의해 朴대통령의 구체적인 핵무기 개발계획의 전모가 드러났다.

핵무기 개발은 朴대통령의 직접 지시에 따라 당시 청와대 경제제2수석실의 오원철 (吳源哲.69.기아경제연구소 고문) 수석과 김광모 (金光模.64.테크노서비스 사장) 비서관의 감독하에 한국핵연료개발공단의 주재양 (朱載陽.64.在美) 소장과 김철 (金哲.59.아주대 대학원장) 개발제2연구부장, 윤석호 (尹錫昊.68.충남대 명예교수) 건설본부장등을 중심으로 핵연료 확보사업이 추진됐다.

최형섭 (崔亨燮.77.포항산업과학연구원 고문) 과학기술처장관과 윤용구 (尹容九.69.동원공전학장) 한국원자력연구소장등이 실무 지휘를 했다.

이같은 사실은 중앙일보가 단독 입수한 '원자력이용개발 제4차 5개년계획' (과기처.78년2월) 과 한국핵연료개발공단의 '사업계획서 (77~81년)' 등 당시 문건들과 핵심관계자들의 최초 증언으로 처음 확인됐다.

입수자료들에 따르면 핵연료 국산화사업은 당초 81년까지 완성할 예정이었으나 미국의 방해와 시설 도입이 지연되면서 83년으로 목표가 수정됐다.

이 사업 실무책임자였던 김철 박사는 "대체사업의 시설들이 83년 완공되고 자체 개발중인 연구용 원자로를 통해 '사용후 핵연료' 를 얻게 되면 85년께에는 핵폭탄 제조에 필요한 플루토늄을 확보할 수 있었다" 며 "플루토늄으로 핵폭탄을 제조하는 기술은 이미 공개된 상태여서 통상 정제된 플루토늄을 필요한 양 (量) 만큼 확보한 시점이 핵무기 보유 시점" 이라고 설명했다.

대체사업의 총예산 (77~81년) 은 내자 2백81억7천8백만원과 외자 4천8백76만9천달러로 모두 5백18억3천3백만원이었다.

한편 핵무기 개발 초기인 73년 겨울 朴대통령에게 보고한 '핵무기 개발계획 극비보고' 에 따르면 핵폭탄은 2차대전말 일본 나가사키 (長崎)에 투하된 것과 같은 20㏏짜리 플루토늄탄으로, 투하방식은 공중투하식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국방과학연구소 (ADD)에서 핵폭탄 설계 연구책임자로 일한 익명을 요구한 Q씨는 "초기 계획된 핵폭탄의 파괴력은 광화문 네거리 상공 5백80m 위치에서 터뜨릴 경우 교문리 일대까지 잿더미로 만들고, 최소한 2백만명의 인명을 살상하는 정도의 규모였다" 며 "70년대중반 이미 핵폭탄설계까지 마친 상태였다" 고 증언했다.

이후 핵폭탄 제조와 기폭 (중투하식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국방과학연구소 (ADD)에서 핵폭탄 설계 연구책임자로 일한 익명을 요구한 Q씨는 "초기 계획된 핵폭탄의 파괴력은 광화문 네거리 상공 5백80m 위치에서 터뜨릴 경우 교문리 일대까지 잿더미로 만들고, 최소한 2백만명의 인명을 살상하는 정도의 규모였다" 며 "70년대중반 이미 핵폭탄설계까지 마친 상태였다" 고 증언했다.

이후 핵폭탄 제조와 기폭 (起爆) 기술은 우리 연구진들이 프랑스 발둑에 있는 핵폭탄제조연구소등에서 계속 연구.개발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78년 9월 사정거리 1백80㎞의 백곰9호 미사일 시험발사에 성공함으로써 핵무기 개발계획은 공중투하방식이 아니라, 미사일에 핵탄두를 장착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그러나 朴대통령의 사망과 이후 등장한 전두환 (全斗煥) 정권의 핵개발 포기로 우리나라의 독자적인 핵개발은 사실상 무산됐다.

더욱이 91년 11월 노태우 (盧泰愚) 당시 대통령이 '핵연료 재처리시설과 핵농축 시설을 보유하지 않는다' 는 '한반도 비핵화 선언' 을 발표함으로써 사실상 핵주권마저 포기하고 말았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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