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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로 가는 마음]4.끝 소설가 정찬주-전남화순 쌍봉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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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쌍봉사의 단풍은 깃발처럼 선동적이지 않다.

어린 시절 해질 무렵에 “영희야, 철수야” 하고 문 밖에 서서 아이를 부르던 어머니처럼 정답고 포근할 뿐이다.

수수하고 아기자기할 뿐 불타는 화염처럼 현란하지 않은 것이다.

쌍봉사를 들를 때는 깊은 가을날 해질 녘이 좋다.

산모퉁이를 돌아서면 단풍 든 사자산 (獅子山) 이 원색의 탱화처럼 드러나고, 3층 목탑 형식의 대웅전이 가랑비 같은 석양 빛에 촉촉히 젖어 있음이다.

근경이지만 절이 작기 때문에 한눈에 들어와 결코 부담스럽지 않다.

그런가 하면 아, 저런 곳이 바로 극락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편안하게 보인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대숲 안팎의 작은 가람 서너채가 단촐한 쌍봉사의 살림 공간이다.

극락이란 한자가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지극할 극 (極) 자에 즐길 낙 (樂) 자를 합친 게 극락이 아닌가.

지극히 즐길 만한 공간이 극락이란 뜻이리라. 따라서 서방정토가 아니라도 그곳이 어디든 아름답고 즐겁고 편안한 곳이라면 다 극락일 터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지금 절로 가고 있기도 하지만 극락을 찾아가고 있는 셈이다.

대학시절부터 수없이 쌍봉사를 찾았지만 현세의 극락을 향해 가고 있다는 느낌은 처음이다.

푸른 대숲도, 붉은 단풍도, 호롱불 같은 석양 빛도 어허, 눈물겹게 좋구나 좋을씨고. 비로소 탁한 세상에 흐려 있던 눈이 맑혀지고, 물소리 새소리에 녹슬었던 귀가 씻어지고 있지 않은가.

대학시절,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이십 몇년 전의 내가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꼭 아득한 전생의 나만 같다.

그때 나는 치약.치솔 하나, 수건 한장 든 가방을 달랑 들고 바람처럼 쌍봉사를 찾았던 것이다.

더운 피가 흐르던 젊은 때였었다.

이땅을 사는 젊음이라면 누구나 내출혈이 있었던 그 시절, 나는 무작정 신라 때 철감 (澈鑑) 국사가 창건한 쌍봉사를 찾아갔던 것이다.

그때의 쌍봉사는 내게 극락이 아니라 일종의 도피처였으리. 좀더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스스로 자원해서 간 유배지라고나 할까. 데모할 용기도 나지 않고 공부도 하기 싫고 해서,에라 모르겠다 소설이나 쓰자 하고 숨어들었던 곳이 쌍봉사였던 것이다.

그런데 쌍봉사는 나에게 정신의 정수기 (淨水器)가 돼주었다.

침묵이라는 맥반석이 탁한 내 영혼을 정수시켜 주었음이다.

그때의 쌍봉사는 폐사 일보 직전의 절인 데다가 인적마저 뚝 끊겨 침묵만이 유일한 생물체처럼 살아 있었던 것이다.

나는 소설을 쓰는 대신 낙엽을 쓸고, 법당에 낀 먼지를 닦으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준 당시 스님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 뿐이었으니까. 절을 떠나기 며칠 전이었을 것으로 기억된다.

그날도 나는 스님이 출타해 버리고 없어 혼자서 무엇을 할까 궁리를 하다가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법당에 낀 먼지를 좀더 구석구석 닦아내기로 하였다.

그래서 오른 곳이 3층 목탑 형식인 대웅전 안의 부처님 연화대였다.

거기까지 오르고 보자 불상 (佛像) 한테도 먼지가 많이 끼어 있었다.

나는 무심히 마른 걸레로 불상의 몸을 닦아나갔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전율하고 말았던 것이다.

부처가 나를 보고 미소 짓고 있었다.

그것은 어린 시절 교과서에서 배운 석굴암의 잔잔한 미소가 아니라, 내가 도달할 수 없는 높은 경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었다.

미소 (微笑) . 절에 온 이후, 매일 보면서도 보지 못했던 부처의 미소를 나는 발견한 것이었다.

그후부터 나는 무슨 비밀을 알아낸 것처럼 불평 없이 절생활을 할 수 있었다.

밖에 눈이 오건 비가 오건 스님이 있건 없건 간에 상관 없이 미소를 짓고 있는 부처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나는 지금 부처의 미소를 만나러 가고 있기도 한 것이다.

쌍봉사 대웅전 부처의 미소를 한동안이나마 내 욕심의 헛가지를 잘라내고 닮아 보고 싶은 것이다.

절 의 해탈문 (解脫門) 을 들어서는 순간 또 하나의 작은 깨달음이 온다.

단풍이 산이나 경내의 감나무나 단풍나무에만 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대웅전에 입혀진 단청 (丹靑) 도 또다른 단풍인 것이다.

자연을 붉고 푸르게 묘사한 상징적인 그림이 단청이기 때문이다.

국화가 모과의 향내를 맡으며 법당에 들어가 집안의 큰 어른에게 인사하듯 절을 한다.

그러고 보니 대웅전의 우물 같은 천정도 단풍으로 단장되어 있는 것이 새삼스럽다.

부처의 미소에도 단풍빛이 어려 있고. 대웅전 마루 바닥에 앉아 다시 이십 몇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본다.

아니 그 이전으로 달려가 본다.

초의 (艸衣) 선사가 보았던 부처의 미소나 내가 만났던 부처의 미소와 무엇이 다를 것인가.

아니 천년 전 철감국사가 보았던 부처의 미소와, 그 이전 석가모니 부처와 가섭 간에 오가던 염화 미소와 무엇이 다를 것인가.

나는 지금 저 화두 (話頭) 같은 미소 하나를 타고 시공을 넘나드는 법열에 사로잡힌다.

지금 내 옆에 초의선사가 앉아 시정에 잠겨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는 어느 가을 날 쌍봉사를 찾아와 이런 서정시를 읊조리게 된다.

“내 누추한 거처를 감싸고 있는 물건/뜨락에 가득한 자죽과 오죽일세/맑은 가을 길 가리지 않으면서/어느덧 고운 대무늬를 껴입었구나.” 그가 보았다는 물건은 철감국사 부도탑으로 가는 길에 난 자생 대나무를 가리키는 것이리라. 지금은 굵은 대나무들만 있지만 당시는 자죽 (紫竹) 과 오죽 (烏竹) 이 있었나 보다.

가는 길에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차나무이다.

마침 감꽃처럼 생긴 차꽃이 하얗게 벙그는 계절이다.

단풍이 들고 낙엽 지는 계절에 꽃을 피우는 차꽃이다.

향기는 없지만 기품이 있어 보이고, 감꽃 목걸이만 차고서도 여자 아이들이 행복해 하던 어린 시절의 순수가 문득 그립다.

단풍숲을 배경으로 이처럼 아름다운 돌의 조각품을 본 적이 없다.

수백번을 보았지만 물리지 않는 것이다.

천년 전에 이같은 조각품을 어찌 만들었을까. 입으로 다 말할 수 없는 빼어난 조각품이므로 보는 이의 천품 (天稟)에 따라 감상할 수 밖에 없는 부도이다.

그래서인지 국보 제57호라고 쓰인 무성의한 표지석이 왠지 무례하게 보인다.

어느새 둥둥둥 법고소리에 산그림자가 접히고 있다.

중학교 1학년생 정도나 될까. 서울에 두고 온 딸아이 또래의 아이가 저녁공양을 하라고 말한다. 주지 관해 (觀海) 스님 얘기로는 어떤 할머니가 몇년 전에 그 아이를 맡겨놓고는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말하자면 이름을 불러줄 가족이 나타나지 않는 외로운 아이다.

자비심이 곧 여래 (如來 : 부처) 라고 했던가.

몸속에 해일이 일 것 같은 사춘기의 그 아이에게도 쌍봉사 대웅전의 부처는 미소를 짓고 있다.

관해스님이 “슬기야” 하고 부르자 내 앞에 선 아이의 볼에도 단풍이 붉게 물들어 있고. 나는 부질없는 생각 하나에 잠기고 만다.

딸아이처럼 그 아이에게도 똑같이 아버지 노릇을 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계면쩍게 호주머니를 뒤져 아이의 공책값.참고서값을 찾아본 것도 그러한 마음 때문이었으리라.

정찬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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