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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포커스]PC통신 이색동호회…'흘러간'이름가진 이들 모여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2면

'경숙.영희.미숙.정순.광수…' 너무 흔한 이름들이다.

30줄을 넘긴 한국인중 이런 이름의 친구 하나쯤 없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에게서 '흘러간' 이름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다들 세련되고 깔끔하다.

아름.지민.다솜.은지 등등. 그런 면에서 PC통신 나우누리의 동호회 '영희랑 영수랑' 은 엉뚱한 모임이다.

짐작대로 회원들의 이름은 영희 아니면 영수다.

모두 79명. 대부분 이 이름을 가진 마지막 세대인 70년대 중후반생 대학생들이다.

막내인 초등학교 6학년생 이영희양이 있긴 하지만. 왜 영수와 영희일까. 이 동호회를 만든 대표 이영수 (24.회사원) 씨. 그는 심심하던 차에 자신과 같은 이름의 가입자를 검색해 봤다.

왜 그리 많은지. 김.박.최…돌아가며 영수라는 이름을 검색했다.

대략 3백명. 그 순간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 '영수만의 모임' 을 만들자. 그게 '영수회담' 아닌가.”

통신망의 모든 영수에게 메일을 보냈다.

모임을 만들자고. 그때 아이디어가 또 떠올랐다.

“영수만 있으면 외로우니 파트너 '영희' 와 함께 하자. ” 동호회는 이런 식으로 9월 중순 결성됐다.

그런데 이름이 같다는 점 하나만으로 저렇게 살갑게 지낸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이씨의 말 - . “초등학교때 교과서에 자주 등장했던 이름이잖아요. 그래선지 은연중에 우리 스스로를 어린아이로 생각하고 있나봐요. 당연히 서로를 순수한 마음으로 대하게 되죠. ” 한 시인은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고 했다.

사라지는 이름 뒤에 남는 여백에는 개구쟁이들의 낙서만 빽빽할 것 같다.

문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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