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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남매상 옷 갈아입히는 ‘따뜻한 오지랖’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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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누군지 몰라도 오지랖도 넓네. 그깟 동상, 옷은 왜 입혔담.’

호되게 춥던 1월의 어느 날. 서울 성동구 살곶이 공원의 남매상(‘동심의 여행’, 오원영 작품)에 누군가 옷을 입혀 놓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취재 가던 길이었습니다. 얼얼해진 뺨을 비비며 누군가의 ‘오지랖’을 어찌나 원망했던지요.

따뜻한 털옷을 입은 남매상을 보고서야 마음이 녹았습니다. 옷을 입지 않았을 때의 사진을 보니 ‘많이 추웠겠다’ 싶더라고요. <본지 1월 13일자 14면>

2월 중순 남매상에 옷을 입힌 이가 밝혀졌습니다. 그분의 친구가 몰래 구청에 제보를 한 거죠. 공원으로 운동을 나오는 김모(47·여)씨의 눈에 남매상이 들어온 것은 지난해 11월 말. 20여 년간 미싱사로 일해온 솜씨를 발휘해 남매의 몸에 딱 맞는 체크무늬 커플 티를 만들어 입혀줬지요.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아주머니의 따뜻한 오지랖은 민들레 씨앗처럼 퍼져나갔습니다. 남매상은 지금껏 4벌의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지금은 보라색 별무늬 망토(남아)와 빨간 망토(여아)를 두르고 있습니다(사진). 아주머니는 딱 한 번 입혔는데 그 후 다른 사람들이 남매를 보살핀 거죠. 그들이 누군지는 아직 모릅니다.

올 4월부터 한양여대 의상디자인과 홍선옥 교수가 전속 코디네이터를 맡습니다. 홍 교수와 학생들이 만든답니다. 세 살배기 아들과 상상 속의 여아를 모델로 조각상을 만든 오원영(38) 작가는 “작품에 낯 모를 이들의 사랑이 더해져 더 빛나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처음 옷을 입혔던 아주머니께 전화를 걸었습니다. 아이와 관련된 아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을 거라고 짐작했죠.

“그냥요, 추워 보여서요”라는 싱거운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대단한 사연이나 거창한 이유가 있어야만 세상을 움직이는 건 아닙니다. 따뜻한 오지랖만으로도 세상을 환하게 할 수 있죠.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재봉틀을 밟았을 아주머니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아주머니도, 이름 모를 3명의 ‘디자이너’도, 홍 교수님도, 오지랖이 넓으시네요. 

임주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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