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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씨의 사람구경]6.영화'접속'감독 장윤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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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옛날 옛적,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장산곶매라는 이름의 영화집단이 있었다. 너무나 까마득한 옛날 옛적이라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소위 1980년대라는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이 있었나?

구보씨조차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새로운 밀레니엄을 바라보는 지금,2002년의 월드컵개최권을 따놓고 설레이는 마음으로 새로운 천년왕국을 기다리는 지금,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으로 온나라가 야단법석을 떨던,‘군사파쇼’와 ‘양키 제국주의자’들은 물러가라고 온몸을 던지고 심지어 불사르던(이건 단지 수사법이 아니다),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여당도 대통령후보를 완전한 자유경선으로 선출하고, 경선에서 탈락한 후보가 경선결과에 불복하고 탈당해도 무사하고, 심지어 전라도 출신의 야당 대통령후보가 몇달째 지지율 1위를 차지하고 있어도 쿠데타가 일어날지 모른다는 흑색선전조차 돌지 않는, 이런 태평성대를 살다보니 ‘우째 그런’시절이 있었는가 의아스러울 따름이다.

혹시 그런 시절은 없었던 게 아닐까?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지어낸 단지 끔찍한 우화에 불과한 건 아닐까? 사람들은 그런 무섭고도 황당한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던가. 드라큘라나 에이리언 이야기를 영화로 보며 재미있어 하지 않는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나 오즈의 마법사 이야기를 읽으며 재미있어 하지 않는가 말이다. 그런 무섭고 황당한 이야기를. 그렇다고 드라큘라나 에이리언이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나 오즈의 마법사가 진짜로 있는 건 아닌 것처럼,박정희나 전두환이나 노태우도 사실은 없었던 게 아닐까.

구보씨는 그런 생각이 들 정도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드라큘라나 에이리언이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나 오즈의 마법사보다 박정희나 전두환이나 노태우의 이야기는 더 비현실적인 것 같다.

오히려 드라큘라나 에이리언이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나 오즈의 마법사가 있다면 믿을텐데 박정희나 전두환이나 노태우가 실제로 있었던 사람들이라는 말은 믿어지지 않는다.

너무나 무섭고 황당해서, 진짜 있었던 일이라는 게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야기도 웬만해야 믿지. 이건 좀 너무한다 싶으면, 너무 지나치게 무섭거나 황당하면, 심지어 너무나 재미있어도, 이상한 거라고 생각하잖아. 믿어지지가 않는 거지. 구보씨는 여러분께 한번 권하고 싶다.

드라큘라나 에이리언이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나 오즈의 마법사를 다시 읽어보시라고. 그리고 박정희와 전두환과 노태우의 이야기를 또 읽어보시라고. 그리고나서 그중에 어느 것이 더 진짜같은지 비교해보시기를. 각설하고, 아무튼 그 거짓말같은 1980년대라는 시절에 그 이름도 괴상한 장산곶매라는 불법영화집단이 있었으니, 그들이 만들었던 영화는 어떤 영화들이었는가 하면, 그 괴상한 이름만큼이나 괴이하기 짝이 없는 영화들이었던 거디었던 거디다.

'오 꿈의 나라' '파업전야' 라는 영화제목을 들어본 적이 있으신지. '오 꿈의 나라' 는 그 시절에 벌어졌던 광주라는 지방도시에서의 끔찍한 사건이 다 양키제국주의자들 때문 아니겠느냐는 뜬금없는 주장을 했다고 전해지며, '파업전야' 는 노동자들이 자본가들이야말로 악마같은 존재라는 결론을 내리고는 멍키 스패너를 들고 몰려나가는 매우 폭력적인 마지막 장면으로 혁명적 로맨티시즘을 구현한 전설적인 작품으로 전해지고 있다.

어떻게 그런 영화를 만들었을까. 그런 시대가 있었다는 사실만큼이나 믿을 수 없는 일이야. 더더욱 믿기 힘든 사실은 그런 영화를 보기 위해 꽤 많은 숫자의, 그것도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 경찰들의 제지를 무릅쓰고 몰려들었다는 거야. 도대체 믿을 수가 없어. 구보씨는 불과 10년전 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지금도 가끔 절망적인 사고가 터지곤 하지만 대체로는 정상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 나라에, 그런 비정상적인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게 희한하다.

그리고 그 영화들이, 장산곶매라는 이름의 영화집단이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는 것도 희한하다.

사실은 없었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감쪽같이. 구보씨가 왜 소위 1980년대라는 시대와 장산곶매라는 영화집단과 그들이 만들었다는 괴상한 제목의 영화들을 자꾸 들먹이며 귀신 씨나락 까먹는 것같은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바로 우리가 그 장산곶매고 그 시절 그 괴이한 영화를 만든 장본인들이오, 라고 주장하며 두명의 사나이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짠! 이은과 장윤현. 한 사람은 프로듀서가 되고 한 사람은 감독이 되어 다시 영화 한 편을 찍었다는데, 그게 바로 요즘 장안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접속' 이라는 영화다.

관객이 60만을 넘어섰고, 며칠전 대종상 수상식에서 작품상을 비롯하여 무려 6개 부문의 상을 휩쓸었다고도 한다.

이 사나이들은 유령이 아닌 게 확실해. 그들은 정말 있는 거야. 그렇다면 1980년대도 장산곶매도 꿈의 나라와 파업전야도 박정희와 전두환과 노태우도 있었던 거네. 빌어먹을. 구보씨는 그 두 사나이 중 감독으로 데뷔한 장윤현이란 사나이를 만났다.

구보 : 당신이 정말 '오 꿈의 나라' 와 '파업전야' 를 만들었다는 장산곶매 중의 한 사람인가?

사람 : 그렇다.

구보 : 그동안 뭐했나?

어디 있었는가?

사람 : '오 꿈의 나라' 는 이은씨 장동홍씨와 공동연출을 했었고, '파업전야' 는 장동홍씨가 감독하고 이은씨가 제작하고 나는 감독과 제작책임자를 연결하는 일을 했었다.

'파업전야' 제작이 마무리 될 무렵, 그러니까 1990년초 헝가리로 영화수업을 위해 유학을 떠났었다.

구보 : 왜 헝가리였나?

사람 : 사회주의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고, 헝가리 국립영화학교에는 '메피스토' '엠마와 부베의 사랑' 이란 영화를 만든 이스트반 자보가 교수로 있었다.

구보 : 가보니 어땠나?

사람 : 아니었다.

사회주의는 이미 몰락했고, 이스트반 자보도 이미 그 학교를 떠나고 없었다.

구보 : 유학에 실패했다는 말인가?

사람 : 그런 셈이다.

졸업하지 않고 그냥 돌아왔으니까. 하지만 2년 정도 고독한 이방인으로서의 생활을 했다는 거, 그러면서 내 자신과 한국사회에 대해 객관적 성찰을 할 수 있었다는 거, 동구의 문화중심지인 부다페스트의 미술관을 돌며 그림구경한 거, 이런 게 소득이라면 소득이었다.

구보 : 언제 돌아왔나?

사람 : 1993년 초에 완전히 귀국해서 이런저런 일을 하다가, 1995년부터 '접속' 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구보 : 2년이나 걸린 셈인데, 왜 하필 '접속' 이었나? 며칠 전 '접속' 을 보았다.

깔끔하고 무리가 없어보였다.

사람 : 무리가 많다.

구보 : 아니, 전혀 없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깔끔하고 무리가 없는 게 문제라는 거다.

젊은 감독의 데뷔작이 그렇다는 건 매우 문제있다고 본다.

더구나 장산곶매였던 감독이. 제작자의 말을 너무 잘 들은 건 아닌가? 하기는 제작자도 장산곶맨데. 자본가의 말을 잘들어주는 착한 감독이 되고 싶은 건가?

사람 : 헝가리에 다녀오고, 다시 90년대의 서울을 경험하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영화에 대한 생각도 많이 바뀌었다.

구보 : 사이버공간을 매개로 한 멜로드라마가 신선할 수도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봤다.

그런데 20분이 넘어가면서 지루해졌다.

그 정도만 해도 될 이야기를 너무 오래했다.

삶이 그렇듯 사소한 감정의 굴곡만으로, 그렇듯 달콤한 센티멘털리즘만으로 채워질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가? 내가 이상한 사람인지는 모르지만,끝에 가서는 거의 지긋지긋했다.

많은 관객이 들었지만, 이 영화는 마케팅의 성공이지 작가의 성공은 아니다.

사람 : 나는 상업영화의 구조를 선택했고, 거기에는 많은 책임이 따른다.

단편영화나 독립영화라면 다르게 찍었을 것이다.

구보 : 당신은 원만한 성격을 가진 것 같다.

사람 : 그렇다는 말을 듣는 편이다.

구보 : 낙관적인 것 같다.

사람 : 그런 편이다.

어떤 일이든 사람이 합리적으로 노력하면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구보 : 나는 당신에게 80년대의 장산곶매를, 사회주의나 혁명적 세계관을 기대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작가는 순응주의에 빠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작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사람 :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구보 : 아무튼 성공을 축하한다.

글 = 주인석 <소설가)>사진 = 김춘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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