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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행의 옴부즈맨칼럼]마니산,'마리산'으로 불러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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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전국체전 성화 (聖火) 기사를 읽으면서 나는 새삼스럽게 우리 산이름 '바로 알기' 또는 '바로 부르기' 의 화급함을 깨닫게 된다.

신문이나 방송은 거의 성화가 채화 (採火) 된 곳이 강화도의 마니산참성단 (摩尼山塹星壇) 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극히 소수이긴 하지만 마니산을 현지에선 '마리산' 이라 부른다고 쓴 곳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한자로 표기된 '마니산' 을 발음대로 부르고 쓰는 것을 전적으로 틀렸다고 할 수만은 없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산과 그 이름의 역사를 알게 되면 '바로 부르기' 와 '바로 알기' 의 중요성이 강조되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을 바로잡는 일이야말로 매스컴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일찍이 노산 (鷺山) 이은상 (李殷相) 도 지적했지만 비록 한자로는 '마니산' 이라고 썼더라도 읽거나 부르기는 '마리산' 으로 하는 것이 옳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마치 한자로 지이산 (智異山) 이라고 쓰지만 읽기나 부르기는 '지리산' 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의 것이라고 풀이된다.

마리산의 '마리' 의 본래 뜻은 '머리' 라고 일컬어진다.

'마리' , 곧 '머리' 는 두말할 것도 없이 '우두머리' 또는 '최고' 의 뜻을 지니는 것이다.

이것은 마리산이 예부터 우두머리산이며 겨레의 성지 (聖地) 였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겠다.

이것은 이곳에 단군 (檀君) 이래의 제천 (祭天) 의식이 행해진 참성단이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기록을 보면 한자의 '마니' 산을 '마리 (摩利)' 산으로 쓰고 있음이 분명히 드러난다.

'마니' 나 '마리' 란 한자는 고려시대에 흥성했던 불교의 영향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마니' 는 범어 (梵語) 'MANI' 를 한자로 음역 (音譯) 한 것으로 그 뜻은 여의주 (如意珠) 라고 한다.

불가 (佛家)에선 사람이 그것을 얻으면 불속에서도 타지 않고 아무런 해독도 입지 않는다고 믿는다 '마리' 란 한자는 범어 'MARICI' 를 음역한 것인데, 이것은 마리지천 (摩利支天) 이라고 음역되기도 한다.

'마리' 란 신통력을 가진 천신 (天神) 이라는 뜻을 지닌다고 한다.

그 뜻이 어떻든간에 '마니' 나 '마리' 의 한자는 본래 우리말의 음역인 것 또한 사실이고, 그런 차원에서 '마리산' 과 '참성단' 의 본래 뜻이나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거듭 강조해두고 싶다.

특히 참성단과 관련해서는 그것이 만약 외국에 있는 몇 천년 된 '제천' 의 유적이라면 그렇게 방치됐을까 하는 의구심이 절로 생긴다.

참성단도 비록 한자음이긴 하지만 본래는 '삼성단 (參聖壇)' 이었다고 풀이되기도 한다.

이런 풀이는 물론 우리의 전통적인 삼신 (三神) 사상과의 관련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능화 (李能和) 는 우리 겨레의 생각과 마음속에 있는 '삼신' 은 불교의 삼신 (三身) , 즉 법신 (法身).보신 (報身).화신 (化身) 이나, 도교의 삼청 (三淸) , 즉 태청 (太淸).상청 (上淸).옥청 (玉淸) , 그리고 기독교의 삼위일체 (三位一體) 인 성부 (聖父).성자 (聖子).성신 (聖神) 과 동일궤칙 (同一軌則)에 있는 것이라고 갈파한바 있다.

사실 오랜 역사를 가진 민족 가운데 우리처럼 외래사상이나 종교를 내것처럼 받아들이고 꽃피운 민족도 흔치 않다고 지적된다.

이것은 우리의 전통과 역사속에 이미 그런 바탕이 마련됐기에 가능한 것임은 긴 설명이 필요없을 성싶다.

나는 그 바탕으로서 삼신 뿐만 아니라 홍익인간 (弘益人間) 이란 말에 세계성 (世界性) 내지 국제성 (國際性) 을 느끼기까지 한다.

일찍이 우리 조상이 홍익 '민족' 이라 하지 않고 '인간' 이라고 했다는데 대해서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보는 각도에 따라 전국체전의 성화기사는 단순한 행사기사의 일환이라고 치부해버리면 그만인데, 새삼스럽게 '역사' 를 찾고 '의미' 를 되새길 필요가 있느냐고 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비록 스포츠 행사일지라도 어떤 의미있는 이벤트엔 단순한 체육행사의 테두리 안에서 기사를 다루고 편집하는데만 머물러선 안된다고 주장하고 싶다.

더군다나 오늘날처럼 스포츠가 지니는 의미가 스포츠 이상의 것으로 평가되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여기에서 제기되는 새삼스런 문제의 하나는 이른바 인기스포츠에 대한 편승 내지 편향이 너무나 지나치다는 비판을 어떻게 수용하느냐 하는 것이다.

특히 전국체전의 커버와 관련해서도 기사나 편집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소홀하다는 지적엔 반성이 있어야 할줄 안다.

물론 한.일축구 대결을 기폭으로 한 월드컵 예선전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라든지, 프로야구에 대한 팬들의 관심, 그리고 박찬호 (朴贊浩) 와 선동열 (宣銅烈) 을 에워싼 이야기의 꽃들을 많은 지면으로 풍성하게 다루는 것은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당연성이 인기스포츠가 아닌 여타의 스포츠 기사를 소홀히 다루거나 아예 무시해버리는 것을 정당화시켜 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신문에 있어 독자의 관심도 (關心度) 는 어떤 의미에서 상품에 대한 소비자의 '니즈 (needs)' 같은 것이기 때문에 독자의 관심이 높은 기사를 얼마나 알차게 지면에 반영하느냐에 따라 신문의 선호가 좌우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질높은 신문은 그런 속에서 플러스 알파의 지면을 만들어야 하는 법이다.

그를 위해서는 베이식 (basic)에 충실하면서 균형감각을 잃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이규행 <본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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