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11년 만에 금융회사에 공적자금 투입 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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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분석 정부가 금융회사의 체력 증진을 위한 ‘강장제’를 단단히 준비하고 있다. 외환위기 후 11년 만에 대규모 공적자금을 조성해 부실해진 금융회사는 물론 정상적인 곳에도 투입하기로 한 것이다. 부실 금융사에 대한 공적자금 투입은 금융위기 때만 하는 건 아니다. 금융 당국의 통상적인 일이다. 금융권별로 기준을 정해 두고 그에 미달하면 정부가 공적자금을 넣어 정리하도록 돼 있다. 어디까지나 사후 조치다. 따라서 경기가 더 나빠질 경우 부실 금융회사들이 줄줄이 나올 수 있는데도 현행법으로는 정부가 미리 손쓰기가 어렵다.

국내 금융회사들도 당장 쓰러질 정도로 기력이 소진된 건 아니다. 기신기신 움직이고는 있다. 미국발 금융위기와 경기 침체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어 잔뜩 움츠러든 상태다. 이에 따라 기업에 대한 대출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한국은행이 돈을 풀어도 시중에 돈이 돌지 않는다.

금융회사들이 완전히 쓰러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펄펄 살아 있는 것도 아닌, 모호한 상태이기 때문에 금융이 기능 부전에 빠진 것이다. 이런 교착 상태를 뚫어 보자는 게 선제적 공적 자금 투입이다. 이나마도 괜찮을 때 금융회사들의 체력을 보강해 기업과 가계의 부실이 금융회사의 건전성 악화→금융회사의 대출 축소→경기 침체 가속화로 이어지는 걸 막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효과를 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진짜 상황이 안 좋은가 보다” 하는 부정적 인식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금융회사 체력 보강=국내 은행들의 재무구조 건전성을 나타내는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의 평균치는 지난해 말 기준으로 12.1%다. 부실의 기준(8% 미만)보다 4%포인트 이상 높다. 또 정부는 20조원의 자본확충펀드를 만들어 은행들에 순차적으로 지원할 예정이다.

기업들의 사정도 나쁘지 않다. 1997년 말 424%였던 기업의 부채 비율은 지난해 9월 104%에 불과했다. 정부가 해외 설명회에서 “미국 등에 비해 한국의 은행은 튼튼하다”고 강조하는 것도 이런 지표가 괜찮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앞으로다. 익명을 요구한 금융위 관계자는 “올해 들어 연체율이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고 말했다. 은행을 비롯한 금융회사들이 돈 쓸 곳도 늘어나고 있다. 조선·건설·해운회사에 대한 구조조정이 가시화될 경우 은행의 부담은 급격히 늘어난다. 정부의 행정지도에 따라 중소기업과 가계에 대한 대출도 늘려야 할 판이다. 비록 경기 침체가 완만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미리 손을 써놓지 않으면 금융회사의 부실이 연쇄적으로 실물경제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게 금융위 판단이다. 이에 따라 금융안정기금이 조성되면 은행이 대부분 사용할 것으로 보인다. 부실화하지는 않았지만 건전성이 조금씩 나빠지고 있는 금융회사에 대해선 정부가 신청을 받아 공적자금을 지원키로 했다.

진동수 금융위원장이 13일 기자회견을 하고 은행의 자본 확충 방안과 구조조정기금 조성 계획을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부실 채권 매입=정부가 채권을 발행해 조성되는 40조원 한도의 구조조정기금은 2014년까지 한시적으로 운용된다. 외환위기 직후 조성된 부실채권정리기금 규모(21조6000원)의 두 배 수준이다. 진동수 금융위원장은 “40조원이란 규모는 실제 부실 채권 금액이 아니라 그 정도면 경제가 나빠졌을 때 부실 처리가 가능하다고 판단해 산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은행권 부실 채권은 14조3000억원으로 98년 말의 33조6000억원에 비해 규모가 작다. 하지만 금융권 대출자산은 같은 기간 576조원에서 1629조원으로 세 배 가까이 늘었다. 경기 침체가 가속되면 금융권의 부실 채권 규모가 급격히 늘어날 공산이 크다.

과거 부실채권정리기금은 금융권의 부실 채권만 사들였지만 이번에 조성되는 구조조정기금은 기업의 부실 자산을 직접 사들일 수 있게 된다.

◆“경영권 간섭 최소화”=정부가 20조원 규모의 자본확충펀드를 만들자 은행들은 한결같이 신청을 꺼렸다. 지원받은 대가로 정부가 경영권에 간섭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은행들은 “경영권 간섭은 최소화하겠다”는 정부의 다짐을 받고서야 지원을 신청했다.

신설되는 금융안정기금도 마찬가지다. 추경호 금융위 금융정책국장은 “건전한 금융회사에 기금이 사용되는 만큼 경영권 간섭은 최소화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은행들이 경영권 변동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바람에 공적자금 투입 시기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미리 ‘예방주사’를 놓은 것이다.

그러나 경영권 간섭은 금융회사가 어떤 상황에서 정부 지원을 받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금융위는 보통주·우선주를 사들이는 출자, 대출, 채무 보증 형식으로 금융회사를 지원한다. 특히 금융회사가 보통주를 팔아 기금을 지원받을 경우 정부가 실질적인 대주주가 될 수도 있다. 이때 기존 주주들과의 관계가 미묘해진다.

익명을 요구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자금 지원 요청을 은행 판단에 맡긴다고 하지만 결국은 일정 한도를 정해놓고 무조건 갖다 쓰게 할 가능성이 있다”며 “정부가 자금 지원을 빌미로 이런저런 간섭을 한다 해도 은행으로선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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