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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흐름 통찰, 누이와 대화하듯 쉽게 전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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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되면 전 세계 투자자들이 기다리는 편지가 있다. ‘오마하의 현인(賢人)’으로 불리는 가치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79·사진)의 편지다. 그는 1970년부터 버크셔 해서웨이 주주들에게 매년 편지를 써왔다. 편지엔 지난해 투자 실적과 앞으로의 계획을 전하고 경제 흐름에 대한 자신만의 시각도 담는다. 이 회사 주주뿐만 아니라 버핏의 통찰력을 엿보고 싶은 다른 투자자도 그의 메시지를 기다린다. 중앙SUNDAY가 버핏의 편지를 통해 그와 주주·시장 간 소통 방식을 분석했다.

“잔치는 끝났다” 같은 비유 사용

버핏의 편지는 쉽다. 어려운 전문용어(jargon) 대신 평이한 단어와 적절한 비유를 구사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2007년 실적을 주주에게 알리기 위해 이듬해 봄에 쓴 2008년 편지(이하 편지를 보낸 시점 기준)에선 회사의 주력 사업인 보험 분야의 이익이 크게 줄 것이라며 “잔치는 끝났다(The party is over)”고 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로 혼란에 빠진 시장을 향해선 “높은 파도가 지나가면 누가 알몸으로 수영하고 있었는지 드러난다”고 일갈했다. 불가피하게 전문용어를 써야 할 경우엔 친절한 설명을 덧붙인다. 2009년 편지에서 회사채 발행회사의 부도에 대비한 보험의 일종인 신용부도스와프(CDS)를 시시콜콜하게 설명했다.

버핏의 쉬운 글쓰기는 스스로 익히고 다진 것이다.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 어려운 금융용어를 줄줄 늘어놓는 월가의 행태가 반면교사(反面敎師)였다. 버핏은 1998년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펴낸 공시 지침서 ‘쉬운 영어 안내서(A Plain English Handbook)’의 머리말을 쓰기도 했다. 그는 이 글에서 “40년 넘게 상장회사의 공시 자료를 공부해 왔는데, 무슨 말인지 모를 때가 너무 많았다. 어떤 것은 다 읽어 봐도 아무 내용이 없는 것 같았다”고 불평했다. 버핏은 공시 자료가 어려운 이유를 이렇게 분석했다.

“우선 기술적인 용어 때문일 수 있다. 또는 아예 글 쓰는 사람 스스로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기 때문일 수 있다. 혹은 양심적이지 못한 이들이 법률적인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일부러 이해하기 힘들게 글을 쓰는 경우도 있다. 가장 일반적으로는 잘난 척하기 위해 전문용어를 구사하거나 복잡한 문장구조를 만드는 게 문제다.”

버핏은 쉬운 글쓰기를 위한 자신만의 비법을 공개했다.
“버크셔 해서웨이 주주들에게 편지를 쓸 때 나는 내 누이들과 대화하듯이 글을 쓴다. 누이들은 똑똑하지만 그렇다고 회계나 재무 전문가는 아니다. 쉬운 영어는 이해하지만 전문용어는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될 것이다. 내 목표는 단지 서로 입장을 바꿔 내가 누이라면 알고 싶어할 만한 정보를 골라 전달하는 것이다. 성공적인 글쓰기를 위해 반드시 셰익스피어가 될 필요는 없다. 상대방이 알고 싶어 하는 정보를 전달하겠다는 진실한 마음만 있으면 된다. 글을 쓸 때 머리에 떠올릴 만한 가족이나 친척이 아무도 없다고? 내 누이들을 빌려 드리겠다.”
 
“덱스터 인수는 내 가장 큰 실수”

버크셔 해서웨이 주가는 65년부터 2008년까지 연평균 20.3% 올랐다. S&P500 지수가 같은 기간 연 8.9% 올랐으니 수익률이 시장의 배가 넘는다. 버핏이 주주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런 휘황찬란한 실적과 성공담만을 담았거니 생각하면 오산이다.

2008년 편지에서 버핏은 이런 자아비판을 했다.
“93년 미국 제화업체 덱스터를 인수하는 뼈아픈 실수를 범했다. 당시 버크셔 해서웨이 A주 2만5203주를 주고 그 회사를 사들였다. 값으로 따지면 4억3300만 달러였다. 회사가 지속 가능한 경쟁력이 있다고 믿었지만 그 경쟁력은 2~3년 만에 사라졌다. 인수대금으로 지급한 주식 가치가 올라가면서 주주 피해는 4억 달러가 아니라 35억 달러에 이르렀다. 덱스터 인수는 내 가장 큰 실수였다. 하지만 앞으로 더 큰 실수를 범할 수도 있다. ‘나는 못생긴 여자와 잠들지 않았는데, 깨고 보니 그랬다’는 미국 가수 바비 베어의 노래 가사가 연상된다.”

실제로 투자 실수는 이어졌다. 2009년 편지에서 버핏은 지난해 정유업체 코노코필립스의 지분을 늘린 것은 ‘멍청한 짓(dumb)’이었다고 인정했다. 그는 “에너지 가격이 그처럼 극적으로 떨어질지 몰랐다”며 “유가가 다시 오른다 해도 최악의 시점에 투자한 만큼 수십억 달러의 손실을 입을 것”이라고 털어놨다.

아일랜드 은행 두 곳에 2억4400만 달러를 투자한 것도 실수로 꼽힌다. 아일랜드에 금융위기가 닥치면서 이곳에 쏟아 부었던 투자금은 지난해 말 2700만 달러로 줄었다. 버핏이 지난 몇 년간 해온 파생상품 투자도 51억 달러의 손실을 남겼다. 2007년 12월 15만1650달러로 최고치를 기록했던 버크셔 해서웨이 주가는 요즘 7만3000달러 수준으로 떨어졌다.

버핏의 편지엔 경제를 내다보는 그만의 식견이 담겨 있다. 상당부분 적중하기도 했다. 닷컴 거품이 절정에 달했던 2000년 편지에서 “미 경제는 반드시 침체할 것”이라고 썼다. 실제로 2001년 닷컴 거품 붕괴와 9·11테러로 미 경제는 침체의 늪에 빠졌다. 또 집값 등 자산가격이 급등하기 시작한 2004년 당시 편지에선 요즘 우리가 겪고 있는 위기의 뿌리를 이해할 만한 언급이 숨어 있다. “흥분과 비용은 투자 세계의 적”이라고 지적했다. 이는 주식과 주택 가격 상승에 흥분한 사람들이 매매비용 등은 따지지 않고 종목을 수시로 바꾸거나 집을 샀다가 팔아 치우는 것을 보고 한 말이다. 그의 경고는 2007년 이후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수많은 투자자가 지금 대가를 치르고 있다.

“주식 투자로 연 10% 수익은 환상”

지난해 리먼브러더스 몰락 이후 글로벌 금융위기가 이어졌고, 각국 정부는 앞다퉈 경기부양에 나섰다. 이와 관련, 버핏은 2009년 편지에서 “예전엔 컵 단위로 조제했던 경제 처방이 최근엔 배럴(나무통) 단위로 나온다”며 “이로 인해 인플레이션 등 반갑지 않은 후유증이 생길 것”이라고 경고했다.

2008년 편지에선 주가 상승에 대한 환상을 깨라는 조언을 했다. “사람들은 이번 세기 동안 주식 투자로 연평균 10% 수익을 올릴 것으로 기대하지만 그러려면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가 2100년에 2400만 포인트가 돼야 한다.” 다우지수는 현재 6000대로 추락한 상태다.

현재 금융위기의 근본적인 요인의 하나로 지적됐던 글로벌 불균형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잊지 않았다. 2005년 편지에선 미국의 막대한 무역적자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매년 6000억 달러가 넘는 무역적자가 계속되면 미국은 해외의 지주들에게 예속된 ‘소작농의 나라(Sharecropper’s society)’가 될 것이다. 미국은 적자를 메우기 위해 하루 평균 18억 달러씩 빚을 지고 있는데 이는 2003년보다 20%나 높아진 수치다. 이 같은 과소비를 줄이지 않으면 10년 내에 미국인은 연간 소득의 3%를 해외에 갖다 바쳐야 할 것이다.”

2008년 편지에서도 중동과 아시아 국부펀드의 공세는 미국이 스스로 초래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편지로 주주나 시장과의 소통을 꾀하는 경영자가 버핏만은 아니다. GE의 제프리 이멜트가 올 2월 주주에게 보낸 편지도 눈길을 끈다.

“나는 글로벌 기업을 운영하지만 미국 시민이다. 과거 30년간 미국이 기술·제조업 리더에서 서비스업 리더로 변신했다고 남들처럼 믿었지만 잘못된 생각이었다. 궁극적으로 이런 철학 때문에 상거래를 지원하는 역할에 머무르던 금융 서비스가 경제 영역을 넘어서는 복잡한 거래의 시장으로 변모했다. 진정한 공학은 금융공학에 자리를 내줬다. 우리 기업인과 정부는 진정 국가를 위대하게 하는 힘을 망각했다. 그건 바로 혁신을 위한 열정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힘든 노동과 규율, 그리고 창조적 사고를 키우는 교육 시스템이다. 혁신 능력은 재평가해야 한다. 새 기술을 개발하고 국내의 제조업 생산기반도 확충해야 한다.”

한국의 주주들은 언제쯤 해당 기업의 실적과 전망을 나열하는 수준을 넘어 우리 사회의 교육과 국가경쟁력 등 폭넓고 다양한 고민을 담은 최고경영자(CEO)의 편지를 받게 될까.

서경호 ·강남규 기자 praxi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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