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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공약' 강요하는 지역민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대통령 선거철만 되면 후보들의 각종 공약 (空約) 은 어김없이 여론의 도마에 오른다.

후보들은 표 (票) 를 위해 아둥바둥하는 속물쯤으로 비난받기 일쑤고 정치와 정치인은 도매금으로 난타당하게 마련이다.

5일까지 부산.경남지역에서 펼쳐진 후보들의 지방순회는 그런 공약을 과연 누가, 어떻게 만들어내고 있는지 반추 (反芻) 해볼 기회를 주었다.

이회창 (李會昌) 신한국당 총재가 초청된 부산지역 상공인 간담회 (4일) .부산가덕도 신항과 전남광양만 신항에 대한 정부지원의 불균형이 초점이었다.

부산상공회의소 한 간부는 "그쪽 (광양) 은 (李총재가) 아무리 지원해봐야 표가 안나온다.

이쪽은 이것만 지원해주면 표가 다 나온다" 며 취사선택을 강요했다.

한 직능조합장은 "나는 10여년 넘게 조합장을 해 4선쯤 되는 사람" 이라며 당측 참석자들이 알아서 해달라는 식의 독촉을 이어갔다.

그날밤 지역TV 토론에서도 '튀는 질문' 은 예외가 아니었다.

모 중소기업 사장인 한 패널리스트는 "다른 후보들은 녹산공단 용지 분양가격을 50%로 낮추겠다고 다 얘기했는데 李총재도 좀 그렇게 얘기해달라" 고 기정사실화식의 주문을 했다.

다른 패널리스트는 "부산은 빚이 많아 2002년 아시안게임을 위해 부산~울산간 동해남부선의 복선화 사업비 50%를 감당하기 어려운데 어떤 방안이 있느냐" 고 따졌다.

이어 "아시안게임 골프.승마장을 그린벨트안에 건설케 해달라" "정부가 부산교통공단의 빚 1조7천억원을 떠맡고, 또 향후 철도사업비의 70%는 국가에서 부담해야 한다" 는 주문도 잇따랐다.

후보에게 쏟아진 촉구성 질문은 물론 열악한 지방경제 현실과 이에따른 지역발전의 열망이 자연스레 묻어나온 것임에 틀림없다.

또 모든 지역과 모든 후보 사이에 지금 경쟁적으로 분출되는 공통된 '대선 신드롬' 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에도 지킬 선 (線) 은 있다.

마치 빚쟁이가 일도양단 (一刀兩斷) 식 최종선택을 강요하듯 대선을 빌미로 후보를 몰아세우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무리한 요구는 무리한 약속을 낳고 다음 선거때는 다시 "속았다" 고 후회하는 '공약의 악순환' 만을 거듭할 뿐이다.

이젠 다다익선 (多多益善) 이 아니라 '지킬 수 있는 최선의 정책' 을 생각할 여지를 후보들에게 줘야 한다.

대통령은 '그들만의 지도자' 가 아니라 모두의 이익을 조화시켜야 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최훈 정치부 기자=부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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