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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 前대통령 임시행정수도 추진 경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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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최근의 수도 이전 논의가 1970년대 말 박정희 대통령이 추진하던 임시행정수도 건설 계획의 연장이란 주장이 대두되면서 당시 추진 과정과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 궁금증이 커지고 있다. 관련자들의 증언과 자료를 통해 당시 계획을 살펴봤다.

임시행정수도 건설은 1975년 월남 패망 이후 안보에 대한 우려가 심각해지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추진하기 시작했다. 관련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서울이 북한의 장거리포 사정거리 내에 있다는 것이 임시수도 건설의 가장 중요한 추진 배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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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임시행정수도'를 만들겠다고 밝힌 것은 77년 2월 서울시 연두순시 자리에서였다. 그러나 구상은 이미 76년 시작됐다.

임시행정수도 건설의 최초 기획서를 만든 최상철(서울대 환경대학원)교수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76년 6월 초 당시 윤천주 서울대 총장이 나와 건축학과의 주종원 교수를 청구동 김종필 전 총리 집으로 데리고 갔다. 김 전 총리는 대통령께서 안보상황을 우려해 임시행정수도 건설을 구상한다는 설명을 한 뒤 입지 선정 및 기초연구를 의뢰했다. 극비에 부쳐야 한다면서 타워호텔 옥탑방에 사무실을 마련해 줬다. 주 교수와 나는 후보지 8곳을 선정했다. 현재 후보지로 발표된 4곳이 모두 포함됐다. 약 한달 만에 손으로 작성한 보고서를 김 전 총리에게 전달했다."

박 전 대통령은 76년 8월 당시 김재규 건설부장관에게 이 기초보고서를 내주면서 작업을 지시했다.

당시 건설부 도시계획국장이었던 김의원 전 경원대 총장은 "건설부가 세번쯤 박 대통령에게 보고한 뒤 이런 비밀작업을 더 이상 건설부가 맡기 어렵다면서 새로운 기구의 필요성을 건의했다"고 말했다. 그 결과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 내에 실무기획단이 설치됐다.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는 신무기 생산 등을 담당하는 청와대의 별도 조직이었다.

당시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이던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박 대통령은 행정수도 계획을 신무기 생산과 차원이 같은 국방사업의 일환으로 생각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77년 7월 '임시행정수도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78년 초 박 대통령은 연두기자회견에서 "임시로 행정수도를 옮기기 위한 계획을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곧바로 10개의 자문위원회가 구성되고 임시행정수도 계획을 전담하기 위해 한국과학기술연구소에 지역개발연구소가 만들어졌다.

78년 말에는 입지.교통.토지 등 분야별 백지계획 보고서가 박 대통령에게 제출됐다. 79년에는 세계적인 오일쇼크로 행정수도 건설의 재원 확보에 대해 우려가 제기되기도 했으나 임시수도 계획은 일정대로 추진됐다.

79년 10월에는 충남 연기군 장기면을 임시수도 입지로 삼아 기초적인 마스터플랜의 설계까지 완성됐다. 무려 22권에 달하는 보고서는 극비로 분류돼 박 대통령에게 제출됐다.

그러나 대통령 보고일정이 잡힌 상태에서 10.26이 터지는 바람에 이 보고서는 세상에 나오지 못한 채 덮였다. 당시 청와대 관계자들은 박 대통령의 책상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보고서가 '행정수도 건설을 위한 백지계획'이었다고 회고했다.

신혜경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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