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용선’관행이 해운 거품 키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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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분석 “용선 , 재용선, 재재용선, 재재재용선, 재재재재용선….”

지난 주말 서울 중구의 해운업체 A사 사무실에서 만난 한 관계자는 해운업계의 현 실태를 이같이 표현했다. 서울 중구 명동·을지로는 전국의 해운업체 본사가 밀집된 지역이다.

미국발 금융위기 직전인 지난해 상반기 수출 물량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 해운사들이 배를 빌린 뒤 웃돈을 얹어 다시 빌려주는 재용선 사례가 유행처럼 번진 것이다. 해운업체는 5년 전만 해도 50여 개에 불과했다. 그러나 중국발 호황으로 세계적으로 물동량이 크게 늘면서 이후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현재 177개에 이른다. 하지만 많은 업체가 배를 빌린 뒤 재용선을 하면서 해운업계에 거품이 꼈다는 지적이다. 재용선은 한때 10단계까지 되는 경우도 있었다는 게 해운업계의 설명이다.

중견 해운사 JH쉬핑의 최익수 대표는 “ 한진해운·STX팬오션·현대상선 등 대형 업체와 일부 우량 해운사를 제외한 상당수는 이 같은 관행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했다.

해운업계의 근본적인 문제는 세계 경기 침체로 물동량이 줄고 있기 때문이다. 1월 한국 무역항의 컨테이너 물동량은 지난해 같은 달보다 20.2% 줄었다. 아시아 지역의 1월 물동량도 전년 대비 20% 정도 줄었다. 운송 물량이 줄어 해운사 경영이 어려운 상황에서 재용선 관행이 부실을 더 심화시키고 있다는 지적이다. 1980년대 비슷한 해운 거품 및 붕괴 경험이 있는 일본은 지금은 한 차례의 용선만 허용하고 있다. 법으로 규정한 것은 아니지만 업계 자율로 만든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해운업계 관계자는 “ 재용선을 하지 않고 탄탄하게 경영한 곳도 있겠지만 수십 척의 재용선 계약 때문에 최근 법정관리에 들어간 업계 10위권의 삼선로직스처럼 부실 기업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도 이 같은 해운업계의 부실을 파악하고 5일 ‘해운업 구조조정 추진방향’을 밝히기도 했다. 우리투자증권 송재학 팀장은 “부실 업체를 빨리 정리해 경쟁력 있는 회사 위주로 업계가 재편돼야 한다” 고 말했다.

이승녕·문병주 기자

◆용선(傭船·chartering)=화물 운송을 위해 돈을 주고 남의 배를 빌리는 일 또는 그 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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