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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기하듯 ‘화물선 다단계 재임대’ … 운임·일감 줄자 업체들 타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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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서울 중구에 본사가 있는 해운업체 A사의 직원은 지난해 말 일감을 맡길 외국 화주(貨主)로부터 온 전문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외국 화주가 밝히라는 ‘체인’이란 배에 걸려 있는 용선·재용선 관계를 뜻하는 해운업계의 특수 용어다.

국내 해운업계는 이같이 배를 빌린 뒤 웃돈을 받고 다시 빌려주는 재용선 관행이 난무하고 있다. 용선 계약이 복잡하면 한 군데에서만 문제가 조금만 생겨도 여러 회사가 서로 얽히면서 어려움이 커지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A사가 자기 배로는 건실한 운영을 해 이익을 보고 있다 해도 B사에 여러 척의 배를 빌려주고 돈을 못 받게 되면 유동성 위기에 빠지는 식이다. 국내 해운업계의 재용선 관계가 복잡하다 보니 드러난 재무 상태만으로는 회사의 건전성을 파악하기 힘들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우량한 회사와 손댈 회사를 쉽게 구분하기 어려운 것도 이 때문이다.

◆왜 선진국보다 타격이 클까=세계를 휩쓴 해운업계 버블의 시작은 중국이었다. 고성장을 이어가면서 2004년부터 철강 원료인 철광석 등 세계적으로 각종 원자재와 곡물 등의 수요가 크게 늘었다. 모자란 배를 갑자기 만들 수 없는 상황에서 운임은 하루가 다르게 높아져 갔다. 해운업계에 30년을 종사했다는 한 해운사 대표는 “5만~6만t급 화물선을 빌리는 값은 2003년만 해도 하루 1만~1만5000달러 정도였는데 2008년 여름 6만 달러를 넘어섰다”며 “적재화물 1t당 하루 1달러라는 얘기인데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수치였다”고 거품의 규모를 회상했다. 최근 이 가격은 다시 1만 달러 밑으로 내려왔다.

특히 국내 해운업계는 일부 대형 업체를 빼고 재용선 관행이 많아 보통 4~5단계나 된다. 한창 호황이던 지난해 하반기에는 일부 업체들에서 한때 최고 10단계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러 단계로 빌린 배는 화물을 실어 나르는 영업을 통해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하지만 지난해 10월 이후 시작된 세계적 경기 침체로 일감이 급감하면서 국내 해운업계가 직격탄을 맞았다.

지난해 4분기 미국 로스앤젤레스항의 컨테이너 화물량은 전년 동기보다 14% 줄었다. 아시아 지역의 물동량은 20% 넘게 감소했다. 중국은 1월 해외로 나가는 해운 물동량이 전년에 비해 18%, 중국으로 들어가는 물동량은 43%나 줄었다고 발표했다. 세계 5위 항만인 부산항의 컨테이너 물동량도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올 1월은 -24.3%, 2월은 -17.4% 급감했다. 이렇다 보니 일감이 없어 공해상에 떠 있는 화물선이 크게 늘고 있다. 인천 외항의 경우 현재 12척이 정박해 있다. 이들은 부두가 비기를 기다리며 하루 이틀 정박하는 배가 아니다. 실어 나를 화물이 아예 없어 길게는 한 달까지 닻도 내리지 못한 채 그냥 떠 있는 배들이다. 화물선 규모는 2만~4만t급이 대부분으로 자동차 수출용 운반선도 있다. 부산항 외항의 거제 인근에는 이 같은 배가 하도 많아 ‘항계 밖 정박지’가 새로 생길 정도다.

국토해양부는 “해운업계의 물동량 감소로 공해상에 떠 있는 선박이 늘고 있어 해상 안전과 경제적 부담을 줄여 주기 위해 ‘항계 밖 정박’을 탄력적으로 허용키로 했다”고 밝혔다. 항계 밖 정박지가 생기면, 일감 없는 배들이 안전하게 닻을 내리고 정박할 수 있게 된다.

미국 해운·물류 전문 잡지 서플라이 체인 다이제스트지는 지난해 5월 1만2000에 육박하던 건화물 운임지수(BDI)가 최근 90% 넘게 폭락하자 “해운 버블은 금융위기의 주범이라는 미 집값 버블보다 훨씬 심했던 것”이라고 평가했다.

◆구조조정 서둘러야=용선·재용선 단계가 간단한 일본 등 선진국의 해운업체와 달리 최고 10단계까지 복잡한 체인으로 얽힌 국내 해운업체들의 타격이 더 크다. 투기적인 ‘배 돌리기 관행’이 위기를 맞아 문제가 커지고 있는 셈이다.

이렇다 보니 채무 불이행(디폴트)에 빠지는 회사가 늘고 있다. 지난해 말 업계 순위 17위인 파크로드가 채무 불이행을 선언했다. 재용선 문제로 어려움을 겪다 지난달 초 서울지방법원에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신청한 삼선로직스도 3월 6일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외국과 거래하는 외항 해운사가 대부분 등록하는 한국선주협회 양홍근 이사는 “2005년부터 매년 수십 개씩 해운사가 생겼다”며 “신생 회사 중 일부는 영업 기반 없이 배를 빌려 되빌려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현재 배를 운영하는 회사가 빌린 값을 못 내면 그 부담은 연쇄적으로 4~5단계를 거슬러 올라가 다른 업체에까지 타격을 주게 된다. 이런 배가 국내 해운사에만 수백 척에 이른다는 게 해운업계의 지적이다. 대우증권 신진식 애널리스트는 “실제 화물 영업 능력 없이 서류상으로만 배를 빌리고 빌려주던 업체의 정리를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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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녕·문병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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