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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전 임신한 채 했던 작품, 이젠 아들이 주연으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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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호 03면

‘미스터 쓴소리’라 불리는 조순형(자유선진당·74) 국회의원의 집안은 문화계에선 ‘연극 가족’으로 통한다. 아내 김금지(67)씨는 100편이 넘는 작품에 출연하며 연극배우협회장을 역임한 45년 관록의 여배우, 아들 조성덕(39)씨는 배우이자 학자의 길을 걷고 있고 딸인 조소영(38)씨는 연극 기획자로 일하고 있다. 조 의원 본인은 건국 시기 야당 지도자를 지낸 조병옥 박사의 3남으로 정치 명문가 출신이지만, 다음 대에서는 ‘연극 명문가’를 일궈 나가는 셈이다.

문화 DNA - ‘미스터 쓴소리’ 조순형 의원의 부인 김금지씨, 아들 성덕 .딸 소영과 합작 무대

이 세 가족 연극인이 함께 참여한 연극 ‘타이피스트’(연출.각색 원영오)가 화제다. 어머니는 제작을, 아들은 주연을, 딸은 기획을 맡았다. 이 연극은 1970년대 김금지·추송웅 주연으로 큰 인기를 모았다.

특히 당시 김씨가 아들을 임신한 몸으로 무대에 올랐다는 사연을 지니고 있어 더욱 눈길을 끈다. 40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오르는 셈인 조성덕씨는 “어머니뿐만 아니라 삼촌처럼 따르고 존경하던 한국 최고의 성격파 배우를 기념하기 위한 공연”이라며 “코미디라고만은 볼 수 없는 압축적 비애가 스민, 특히 요즘 시의적절한 공연”이라고 설명했다.

4일 오후 가족사진 촬영을 위해 연극이 시작되기 전 성덕씨의 분장실을 찾았다. 익숙한 상황일 거라는 짐작과 달리 연극 시작 전 분장실에 가족이 다 모인 것은 처음이란다. 모자가 공연 전에 긴장을 많이 하는 것도 그대로 닮아 누가 찾아오는 것을 굉장히 싫어한다는 설명에 아차 싶었다. 게다가 조 의원은 전날 국회 법사위가 밤 12시도 넘어 끝나는 바람에 새벽에야 귀가했다가 이른 오후부터 아들의 분장실에 ‘차출당한’ 참이었다.

당시 매일 아내를 에스코트하러 극장을 오갔다는 조 의원은 “40년 전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고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라며 아들이 주인공으로 선 무대에 대한 감개무량한 소회를 “세월이 유수 같다”는 절제된 표현으로 대신했다.

조 의원도 실은 5·16 사진전에 입선한 경력도 있을 정도로 사진에 조예가 깊다. 부인과 만나게 된 계기도 사진이었고 아내를 모델로 찍은 사진 작품도 꽤 된다. 하지만 정치를 시작하면서는 접었다. 가장이자 예술가의 후원가로, 무엇보다 정치인으로 정신없이 살아가는 조 의원의 일상에 예술 활동을 위한 시간은 없었다.

김금지씨는 “조 의원이 연극에 대한 안목이 대단하지만, 전문가가 아니고 문외한이라는 생각에서인지 ‘비평’을 해준 적은 없다. 가족들에게는 전혀 ‘쓴소리’가 없다”고 들려주었다. 그는 “그렇다고 연극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일도 거의 없는데, 자기 딴에는 정보를 알려준다면서 ‘여보, 메세나라는 게 있다는데…’라고 하더라. 아니 그걸 누가 몰라서 못 하나… 요즘에는 그래도 협찬을 얻을 때 이름값 하는 정도의 도움은 된다”고 해서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그러나 자녀들이 모두 연극인으로 성장한 데는 아버지의 말없는 지원이 얼마나 큰 힘이 되었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 가족이 83년부터 살고 있는 곳은 돈암동으로, 연극의 거리 대학로 바로 옆 동네다. 왕성하게 활동하는 멋쟁이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자란 성덕씨와 소영씨는 유년 시절 어머니의 연극을 보고선 거기 나오는 꼬마 역을 하고 싶다고 조르기도 했다.

기획을 맡은 소영씨는 “연기는 체질이 아니고, 극작도 몇 편 해봤지만, 그보다는 아이디어를 내고 공연을 전체적으로 조율하며 엄마와 오빠를 돕는 일이 적성에 맞았다”고 말했다. 이번 공연은 가족이 함께하는 두 번째 무대다. 성덕씨와 소영씨가 유학을 떠나기 전인 2006년 공연한 체호프의 연극 ‘갈매기’에서는 실제 모자가 극중에서도 모자 역할을 맡았다. 그런데 이 작품, 심상치 않았다.

‘갈매기’는 여배우와 극작가인 모자간의 갈등을 다룬 데다 아들의 자살로 끝나는 비극이다. ‘당신들은 예술계의 주도권을 차지한 구습 신봉자들로 자신들이 하는 것만을 진정한 거라고 여기며 나머지는 억압하고 있죠’라거나 ‘어머니의 거실에는 항상 유명인사·배우·작가들이 모였고 그중 나 혼자만 아무것도 아니었어’와 같은 대사도 나온다.

이에 대해 성덕씨는 “내 영화 연기의 시발점이 되는 연극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어머니와 꼭 같이 해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한양대에서 연기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성덕씨는 2008년 ‘부조리 햄릿’으로 뉴욕 오프 브로드웨이 무대(Roy Arias Theatres)에 데뷔하기도 했다. 현재 건국대 영화예술과 강의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학구파 배우다.

아들은 배우로서의 재능을 물려받았으되, 정통 연극연기를 해 왔던 어머니와는 다른 사실적 영화연기를 지향한다. “몸으로 부딪치며 실전 경험을 많이 쌓은 스타일은 아니다”면서도 “아들의 연기를 비판하거나 조언할 생각은 없고, 그 스타일을 인정한다”는 것이 어머니의 코멘트다. 이에 아들은 “어머니의 경지를 따라가려면 멀었다”며 몸을 낮췄다.

“궁극적으로는 어머니 세대의 클래식한 연기와 사실주의적 연기의 스타일 나누기를 뛰어넘어 통합을 이뤄내고 싶다”는 그의 연기 세계가 하나의 일가를 이룰 날이 그다지 머지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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