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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부즈맨칼럼]테레사와 다이애나의 혼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신문기자라면 누구나 이른바 명문 (名文) 쓰기를 원할 터이다.

그러나 역설적 (逆說的) 인지 모르지만 나는 신문기자가 명문쓰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레토릭을 섞어가면서 글재주를 부리는 따위엔 혐오감마저 느끼곤 한다.

신문기자에겐 차라리 명문 (名文) 보다 또다른 의미의 '명문 (明文)' 이 선호돼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사실 명문 (名文) 이란 자칫 주관적인 것이 되기 십상이고, 나아가서는 감정적인 요소가 어쩔 수 없이 글속에 스며들게 마련이다.

이런 뜻의 명문이 과연 신문기사 (記事) 로서의 필요충분조건에 합당한지는 구태여 설명이 필요 없을성 싶다.

신문에 쓰는 글은 어떤 의미에서든 '명문 (明文)' 이 돼야 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명문' 이란 곧 객관적 보도와 사실 전달을 올바로 하는 글을 이름하는 것이다.

신문의 사명이 사실 보도와 진실 추구에 있을진대 객관적으로 명백히 밝히는 글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없을줄 안다.

그런 뜻에서 신문기사로서 참다운 뜻의 명문 (名文) 은 반드시 '명문 (明文)' 이어야 한다는 것을 새삼 강조해 두고 싶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명문 (名文) 과 '명문 (明文)' 에 대한 인식이 별로 명확하지 않은 사례들이 우리나라 유수한 신문들의 지면에서 너무나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마더 테레사' 의 서거와 관련한 기사나 해설은 그것을 웅변해 주고도 남는다.

마더 테레사는 그야말로 역사에 길이 남을 금세기의 '성녀 (聖女)' 다.

그런 '성녀' 를 다이애나와 비교해 그녀마저 성녀화시키려한 일부 신문의 자세는 문제의 심각성이 어디에 있는가를 시사해 주고 있다.

물론 사고사 (事故死) 로 충격을 안겨준 다이애나의 장례식날 공교롭게도 운명한 마더 테레사가 뉴스로서의 비교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승에서의 마더 테레사와 다이애나의 만남이 어떻든간에, 그리고 다이애나가 빈민과 소외계층에 자선행위를 한 평가가 어떻든간에 다이애나를 마더 테레사와 비교한다는 것은 희극 (喜劇) 아닌 비극 (悲劇) 이다.

그것은 마치 속 (俗) 을 성 (聖) 이라고 주장하고, 같은 반열에 올려 놓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밖에 없다.

성 (聖) 이란 글자는 글자 그대로 '성' 스런 것이다.

거기엔 감히 속 (俗) 이 범접할 수 없는 법이다.

옛 글자의 뿌리를 캐보면 성 (聖) 이란 귀 (耳) 로 하늘의 소리 (呈) 를 듣는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성' 은 신의 (神意) 와 통하는 것 또는 말뜻과 도리 (道理) 를 올바로 가리는 것이라고 풀이된다.

그렇기 때문에 '성' 은 곧 달통 (達通) 으로 풀이되기도 한다.

옛 기록을 찾아보면 '성' 이란 글자가 사관 (史官) 을 뜻하는 것으로 쓰였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이것은 역사를 올곧게 기록하는 것의 성스러움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기록들을 보면서 나는 새삼스럽게 역사의 현장에서 신문이 해야 할 사실 보도와 진실 추구의 차원이 어떤 것이어야 하겠는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런데 마더 테레사의 관련기사를 보면 유수한 신문들이 그런 사명감의 차원이 아니라 기본적인 사실 확인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신문을 만들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우선 테레사가 평생을 바쳐 온 '사랑의 선교회' 가 몇 나라에 몇 곳이 있느냐에 대해 신문마다 숫자가 다를 뿐만 아니라 각각 다른 숫자에서도 제대로 맞는 것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1950년 캘커타에서 시작한 '사랑의 선교회' 가 어떤 신문에선 전세계 95개국 4백45개소라고 보도했는가 하면, 또 다른 신문에선 5백10개소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내가 확인한 바로는 전세계 1백26개국 6백개소다.

뿐만 아니라 테레사의 국적에 대해서조차 제대로 보도한 신문이 거의 없었다.

알바니아 태생이라는 것만 썼을 뿐이지 그녀가 1950년 인도 국적을 취득한 인도 국민임을 밝힌 신문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인도정부가 국장으로 치른 테레사의 장례식이 왜 국장으로 결정됐는가의 요인 설명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 빠진 꼴이 됐고, 결과적으로 독자의 궁금증만 더해준 셈이다.

그리고 테레사의 장례식은 인구의 8할이 힌두교도인 인도에서 그야말로 소수종교인 가톨릭이 주재했고, 거기에 인도에서 활약하고 있는 7개 종교 전체가 참여했다는 점에서도 역사적인 일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신문에선 고작 가톨릭.힌두교.이슬람교 등만 밝혔을 뿐 7개 종교의 나머지, 즉 불교.시크교.조로아스터교.기독교에 대해선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한데 테레사 관련기사에서 내가 가장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그런 사실확인보도 못지 않게 테레사의 기사 비중이 전체지면에서 상대적으로 다이애나보다 작게 취급됐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성 (聖) 과 속 (俗) 의 가치판단 문제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그것은 아울러 사회적 목탁으로서 신문의 올바른 위상이 무엇인가를 되묻게 해주고 있다.

바야흐로 오늘날의 정치사회적 상황이나 혼미는 매스컴이 만들기도 하고 또 매스컴 속으로 피드백되기도 한다고 일컬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선 '성' 과 '속' , 곧 진 (眞) 과 가 (假)에 대한 올바른 변별이 더욱 절실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이규행<본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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