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싼 값의 위안거리' 돈 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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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대공황 때도 성장한 산업은 있었다. 바로 라디오다. 1920년 등장한 라디오의 미국 내 보급률은 1932년 60%대에 달했다. 1938년에는 보급률이 80%까지 높아지며, 잡지를 제치고 최대 광고매체로 떠올랐다. 주머니가 가벼워진 미국민이 ‘싼값에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는 위안거리’로 라디오를 택했던 것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라디오를 통해 ‘노변정담(fireside chats)’을 시작한 것도 1933년이었다. 당시 청취율은 매회 80%를 넘었다.

#올 들어 2월까지 미국의 영화 티켓 판매 수입은 전년에 비해 17.5% 늘었다. 이대로 간다면 영화 판매 수입은 올해 2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할 것이란 게 현지의 예상이다. 대공황 이래 가장 심각하다는 불황이 미국민을 이번엔 거실의 라디오가 아니라 영화관으로 불러 모으고 있는 것이다.

영화관 앞이 붐비는 것은 미국만이 아니다. 프랑스에서도 올 1월 극장 관객수가 지난해보다 4% 늘었다. 르피가로는 “현실에서 느끼는 위기를 잠시라도 잊기 위해 극장을 찾는 관객이 늘어난 것”이라고 전했다.

국내에서도 ‘8000원짜리 위안’을 찾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다큐멘터리 영화 ‘워낭소리’에 200만 명이 넘는 관객이 몰리는 등 올 들어 2월까지 누적 영화 관람객 수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6.3% 늘었다. 국내 영화 관객 수는 2007~2008년 2년 연속 줄고 있는 상황이었다. 소재 고갈로 별 히트작을 내지 못하면서 ‘영화산업의 위기’라는 말도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하지만 불황이 급반전의 계기를 제공했다. CJ CGV의 조재형 과장은 “올해에는 기대작도 많아 관람객이 크게 늘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며 “상반기 내 전국 다섯 곳에 직영관을 새로 여는 등 투자도 늘리고 있다”고 말했다.

영화가 불황에 강하다는 속설은 현실에서도 여러 차례 입증됐다. 미국에서 저축·대부조합의 부실이 터지며 실업률이 10%에 달했던 1982년 영화 관객 수는 전년보다 10% 증가했다. 반면 호황이었던 85년에는 오히려 12% 줄었다. 신영증권 한승호 연구원은 “다른 요인들도 있어 정확하게 역의 관계를 갖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영화가 다른 산업에 비해 경기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초대형 히트작도 불황기에 나왔다. 국내에서는 외환위기 직후인 99년 ‘쉬리’, 정보기술(IT) 산업의 거품이 터졌던 2001년 ‘친구’, 카드대란이 일어났던 2003년에는 ‘살인의 추억’ ‘실미도’ 등이 줄줄이 등장했다.

영화가 전통적인 불황 내성(耐性)산업이라면 온라인 게임은 새롭게 떠오르는 총아다. 삼성증권 박재석 연구원은 “온라인 게임의 이용 시간은 특히 취업률과 연관이 깊다”며 “취업률이 높아지면 게임 이용 시간은 줄고, 낮아지면 이용 시간이 늘어난다”고 말했다. 가격경쟁력도 영화 이상으로 뛰어나다. 국내 온라인 게임 업체의 가입자당 월평균 매출은 2만4000원 수준이었다.

이들 ‘청개구리 산업’의 실적과 주가도 상승세다. 신영증권은 최근 리포트에서 CGV의 올해 매출이 12%, 영업이익이 11%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하며 매수 의견을 제시했다. 엔씨소프트·네오위즈게임즈·CJ인터넷 등 온라인 게임업체의 경우 불황에다 원화가치 하락이라는 이중의 혜택을 보고 있다. 활발한 해외 진출로 로열티 수입이 급증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한국투자증권은 CJ인터넷의 올해 매출과 영업이익이 각각 18.7%, 16.8%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소비자들은 눈높이만 낮춘 게 아니라 ‘입맛’도 낮추고 있다. 농심은 지난해 4분기 매출이 전년보다 8.4%, 영업이익은 37.4% 늘어나며 시장의 예상치를 뛰어 넘었다. 라면 덕이다. 키움증권 박희정 연구원은 “한 끼 식사로 가장 저렴한 게 라면이라는 점에서 올해 실적 전망도 밝다”고 말했다.

조민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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