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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식 짝짓기 풍속도 "신나게 놀고 애인도 만나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7면

70년대말 풍경 하나. 젊은이 8명이 빵집 탁자 주위에 앉아 있다.

남자 4명에 여자 4명. 남북적십자 회담처럼 남녀가 테이블 양편으로 갈라져 있다.

한 남자가 수첩 한장을 뜯어서 8조각으로 나누고는 번호를 적는다.

남녀가 각각 한조각씩 갖고 서로 눈치를 살핀다.

속으로 마음에 드는 사람을 점찍고 '하느님, 제발 저 사람에게 저와 같은 번호를 주십사' 를 수없이 되뇐다.

그때는 그렇게 미팅에서 짝이 맺어졌다.

80년대말. 젊은이들이 앉아 있는 모습은 같다.

장소는 빵집에서 카페로 바뀌었다.

나눠 가진 종이가 10년전보다 크다.

10년전에는 한사람이 대표로 번호를 적었건만 서로 무언가를 적느라 부산하다.

종이를 펴보면 자리 건너편에 앉아 있는 이성들의 이름이 1지망에서 3지망까지 순서대로 적혀 있다.

이른바 '학력고사팅' .우선 1지망에서 서로 선택이 맞아 떨어진 남녀부터 짝을 지어 나간다.

97년 8월31일 낮1시 서울 역삼동 노보텔 앰배세더의 나이트클럽 '술탄' . 여느 때면 문을 열지 않을 시간이지만 남녀 3백여명이 실내를 꽉 메웠다.

남자는 모두 파란 야광 팔찌를, 여자는 빨간 팔찌를 끼고 있다.

음악이 터져 나오고 모두들 무대에서, 통로에서 몸을 흔든다.

춤을 추면서도 눈으로는 열심히 사방을 살핀다.

한 남자가 멋지게 춤을 추는 아가씨에게 접근해서는 팔찌를 내민다.

아가씨가 홱 돌아선다.

실패다.

다른 아가씨에게 다시 한번 시도. 이번 아가씨는 남자의 파란 팔찌를 받아들고서 자신의 빨간 팔찌를 내민다.

서로 팔찌를 바꿔 찬다.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여자가 파란 팔찌를, 남자가 빨간 팔찌를 차게 됐다.

'임자 있소' 라는 표시다.

4시간의 댄스파티 끝에 이렇게 맺어진 남녀가 41쌍이었다.

이날 행사는 배우자 정보회사 듀오 (DUO)가 마련한 짝짓기 댄스 페스티벌이었다.

이처럼 어떤 행사를 마련하고 여기에 많은 수의 미혼 남녀가 참석하는 '이벤트 짝짓기' 가 최근 성업중이다.

이런 행사는 95년부터 시작됐다.

짝짓기 이벤트의 대표회사이자 선두주자인 듀오는 95년 4건, 96년 15건에 이어 올해는 벌써 19건의 행사를 가졌다.

이벤트 미팅이 늘어나는 이유는 젊은이들의 호응이 좋기 때문이다.

무역회사에 근무하는 홍은석 (29) 씨는 이렇게 '이벤트 미팅 예찬론' 을 말한다.

"우선 참가 인원이 많아 선택의 폭이 넓다.

또 짧은 시간이나마 서로 부담없이 놀고 즐기다 자연히 마음에 드는 대상을 택할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남녀가 각각 3~4명 정도 나오고, 초면에 상대를 정해야 하는 일반 미팅과는 비교할 수 없다.

" 이벤트 미팅은 그 종류도 다양하다.

댄스 페스티벌은 그저 짝짓기 이벤트의 한 예일 뿐. 각종 레저와 연결된 스키팅.승마팅.등산팅.수상스키팅.단풍놀이팅.포켓볼팅.볼링팅, 파티의 종류에 따라 이름을 붙인 바베큐팅.피자팅, 수영장에서 벌이는 수중미팅 등도 있다.

스키.승마등 레저가 관련된 이벤트는 취미가 비슷한 사람끼리 여가를 즐기며 만남을 갖는 경우다.

스키를 타러 올라가는 리프트에서 만남을 갖고 또 캠프파이어를 통해서도 서로 어울리며 짝을 찾는다.

포켓볼팅은 솜씨를 필요로 한다.

당구대 하나마다 남녀 다섯명씩이 배정된다.

가슴에는 모두 번호를 달고 있다.

한 사람이 공을 쳐 포켓에 집어 넣으면 그 공과 같은 번호의 사람과 짝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상대방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도 있으니 포켓볼을 잘 친다고 짝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볼링팅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여성이 핀을 쓰러뜨린 경우 쓰러진 핀 번호에 해당하는 남자들이 1차 '짝' 후보가 된다.

후보들은 모두 핀을 쓰러뜨린 아가씨에 대한 평가를 숫자로 적어내고 그중 최고 점수를 준 사람이 짝이 된다.

우선 핀을 많이 쓰러뜨려야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높은 점수를 줄 지는 모르는 일. '운칠기삼 (運七技三)' 이라는 말이 적용되는 셈이다.

개그팅이란 것도 있다.

한 사람씩 앞으로 나와 참석자를 웃기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 와중에 본연의 모습이 조금씩 드러난다.

얌전을 빼고 앉아 있는 보통의 미팅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행사를 끝내야 할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짝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은 마지막에 80년대 '학력고사팅' 을 치른다.

그래도 혼자인 사람들을 위해 때때로 '패자부활전' 이 마련되기도 한다.

맥주집 등에 이들을 모아 놓고 맥주와 음료, 그리고 가벼운 안주를 시킨 뒤 이벤트 회사에서 거기까지 계산을 하고 물러간다.

술을 마시고 서로 소리내 떠들다 보면 마음이 통하는 짝이 태어나게 된다.

계기성 행사들도 있다.

휴가철에 벌이는 여름 미팅캠프.크리스마스 미팅.송년가면 미팅등이 그것. 휘영청 밝은 달이 두둥실 떠오르는 한가위도 미팅 이벤트 회사로서는 놓칠 수 없는 기회다.

배우자 알선회사 ㈜선우이벤트 (02 - 747 - 2345) 는 추석을 맞아 귀향길 카풀팅을 벌인다.

부산.대구.광주.대전으로 버스 10대를 마련해 놓고 13일 오후 고향가는 버스안에서 미팅을 한다.

버스에는 20쌍의 남녀가 타게 된다.

여성은 창쪽, 남성은 통로쪽에 앉고 일정시간마다 파트너를 바꾼다.

그 중 마음에 드는 사람을 정하고 도착전 이름을 써 내면 일치하는 사람끼리 맺어주게 된다.

이를 '로테이션 게임' 이라고도 하며 등산팅.단풍놀이팅.여름 미팅 캠프 등에서 목적지로 가는 버스안에서도 벌어진다.

올추석 에 초청될 남녀는 각 2백명. 11일이 마감이지만 벌써 남성 1천여명, 여성 2백30여명이 신청했다.

듀오 (02 - 584 - 1777) 는 13일 저녁 남산 타워호텔 로즈룸에서 행사를 벌인다.

남녀가 각각 안쪽 원과 바깥 원을 만들고 강강수월래를 하며 돌다가 만난 파트너와 이야기를 나눈다.

이를 몇차례. 또 그밖에 여러가지 짝짓기 게임을 갖고 짝이 이뤄지면 남산 팔각정으로 올라가 달맞이를 한다는 계획이다.

이런 짝짓기 행사는 대부분 유료다.

단풍놀이나 등산은 1만원 정도지만 1박2일 행사의 경우 5만원에서 10만원 가까이 하는 경우도 있다.

31일의 댄스 페스티벌도 참가비는 1만9천원. 그래도 젊은이들은 '아깝지 않다' 는 반응이다.

"실컫 춤추고 신나게 논 것만 해도 돈이 아깝지는 않아요. 게다가 짝까지 얻었으니 얼마나 좋아요. " 1살 연하의 김모 (24.연세대) 군을 만나 '베스트 댄스 커플' 상까지 받은 정모 (25.서울산업대) 양의 말이다.

현재 국내에서 이벤트 미팅을 행사를 활발히 치르는 회사는 4개 정도. 모두 이벤트 미팅 뿐 아니라 회원으로 등록하면 걸맞는 결혼 상대를 찾아주는 결혼정보 사업도 함께 한다 이벤트 미팅이 있을 때면 이들 회사는 PC통신등을 통해 이를 알리고 사람들을 모집한다.

또 승마나 스키등 개인의 취미에 따라 참석여부가 달라질 경우는 취미를 파악하고 있는 회원들만 참가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이벤트 미팅을 포함한 결혼정보 시장은 해마다 커진다.

가장 큰 회사인 듀오의 경우 지난해 매출은 82억이었으며 올 상반기에만 73억원을 거둬들였다.

권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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