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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의 기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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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생각해 보면 나는 천주교와 인연이 많았다. 내가 어렸을 적에 우리 집 근처에는 유치원이 없어 부모님은 먼 곳에 있는 천주교 유치원에 우리 형제들을 보냈다. 천주교 교육을 어려서부터 받으면 바른 사람이 될 것이라는 부모님의 소박한 바람도 있었다. 그 유치원은 꽤 멀었다. 15분 정도 버스를 타고 가 차에서 내려서도 다시 한참을 걸어가야 대학까지 있는 천주교 학원 후문에 겨우 당도할 수 있었다. 그러고서도 폭이 넓은 수많은 돌계단을 또 숨을 헉헉거리며 힘겹게 올라가야 우리 유치원에 도착했다.

우리 형제들은 초등학교도 그 학원의 초등부에 진학했다. 매주 한 번 종교시간이 있었는데, 우리는 성당에 가서 파란 눈의 신부님과 수녀님으로부터 말씀을 들었다. 나는 신자가 되진 않았지만 어려서부터 하느님에 대한 얘기를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기도하는 습관 등을 몸에 익혔다.

초등학교 4년 때 종교시간에 나는 손을 번쩍 들고 담임선생님인 수녀님께 질문을 했다. “선생님, 하느님이 계시는데 왜 세계에는 전쟁이 많고 불행한 일도 많은가요?” 수녀님은 금방 대답을 못하셨다. 그리고 나는 항상 가슴에 담아두었던 질문을 또 하나 했다. “선생님, 예수님이 십자가로 가시는 것이 하늘의 뜻이었다면 예수님을 배신할 사람이 필요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그렇다면 예수님을 팔아 넘긴 유다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면서 왜 지옥에 가야 했나요?” 이 질문에 수녀님은 당황하셨다. 나는 그런 면에서 조금 조숙한 초등학생이었다.

내 질문을 마음에 두신 수녀님은 한참 후 나에게 일부러 편지를 써서 정중하게 설명해 주셨다. 그리고 수녀님은 나를 평생 기도하는 50명 명단에 넣고 아침저녁으로 매일 기도하고 있다고 알려주셨다. 나는 어른이 된 후에도 가끔 수녀님의 그 말씀이 생각나 항상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분이 계시다는 사실에 큰 고마움과 용기를 느꼈다.

그 학교는 중학교부터는 여학생만 뽑기 때문에 우리 남학생들은 각자 다른 중학교로 흩어졌다. 그러나 그 수녀님은 5학년 때 우리 담임을 맡으셨기 때문에 그 후에도 수녀님과 우리 동창들은 가끔 만날 기회가 있었다. 내가 결혼했을 때 수녀님은 우리를 많이 축복해 주셨다. “유지군, 참 좋은 사람을 얻었네요. 우리 학교에도 지금 한국인 학생들이 늘고 있는데 똑똑한 아이들이 참 많아요”라고 하시면서 온화하게 미소 지으셨다.

수녀님은 몇 년 전에 선종하셨다. 그 소식을 들은 나는 가장 소중한 보물을 잃은 것처럼 허탈했다. 한국에 살고 있어서 금방 달려갈 수도 없어 더욱 안타까웠다. 일 년쯤 지난 후에 나는 혼자서 조용히 수녀님의 묘지를 찾았고, 오랜만에 모교도 둘러보았다. 옛날과 별로 달라지지 않은 교정을 돌아보자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성탄절 전야에는 우리 반 아이들이 수녀님과 밤새워 놀았던 교실도 그대로였다. 종교를 초월해 나를 사랑해 주셨던 그분의 고독하지만 아름다운 생을 생각하면서 나는 한없이 푸르렀던 그날의 하늘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나를 위해 기도해 주고 말씀해 주신 수녀님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올바른 사람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다.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도 아름다운 정신은 그가 사랑한 사람들의 영혼에 큰 감동을 주어 그들의 영혼에 의해 계승된다. 2월 중순의 명동 거리는 우리에게 그 진실을 깨우쳐 주고 있었다.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일본지역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