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방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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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호 14면

춥고 허전해서 그랬을까? 나는 밤에 자다가 깬다. 옆에 자고 있어야 할 아내가 없다. 나는 보일러 온도를 0.5도 올린다. 아내는 어디로 갔을까? 오줌 누러 화장실 갔나? 아내는 화장실에 없다. 변기를 보자 나는 오줌이 마렵다. 오줌을 누고 나오는데 아이들 공부방에 불이 켜져 있다.

남편은 모른다

“이 녀석들, 불 끄라고 그렇게 말했건만.” 나는 투덜거리면서 방문을 연다. 그런데 거기, 아이들 공부방 바닥에 아내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자고 있는 게 아닌가. 원래 아내는 어두운 것을 싫어해 불을 켜 두고 자는 버릇이 있다. 하지만 남편은 모른다. 왜 아내가 여기서 자는지, 언제부터 이렇게 따로 잤는지.

이순재 선생님처럼 아무것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안방으로 돌아가 잘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나는 이미 루비콘강을 건너버린 카이사르다. 아내의 머리맡에 던져진 주사위처럼 앉아 나는 아내의 모습을 본다. 아내는 자세가 당당해 덩치라고 내가 놀릴 정도였는데 이렇게 웅크리고 잠든 모습은 작고 가냘프다.

나는 아내가 잠들기 전까지 읽었을 책을 한쪽으로 치우며 방을 둘러본다. 그때 처음 남편은 발견한다. 이제 이곳이 아내의 방이란 사실을. 원래 책상 두 개가 나란히 붙어 있고 책장에는 아이들 보는 책이 꽂혀 있고 옷걸이에는 아이들 옷가지가 걸려 있던 방이 지금은 아내의 물건들로 가득하다.

아내가 읽었거나 읽고 있는 책들, 아내가 마시던 커피가 남아 있는 컵, 아내의 모자와 머플러, 아내가 듣는 음악 CD들, 아내가 바르는 핸드크림 등이 그 방의 진정한 주인이 아내란 걸 시위한다. 결국 공간의 진정한 주인은 소유권자가 아니라 점유권자다.
나는 궁금했다. 어째서 아내에게 별도의 공간이 필요했는지.

어째서 아내는 따로 잠을 자는 건지. 남편은 모른다. 내가 안방에서 아이들과 함께 ‘꽃보다 남자’와 ‘라디오스타’를 보며 낄낄거릴 때 왜 아내가 아무 말 없이 안방 문을 닫아 주고 아이들 공부방으로 갔는지. 그곳에서 왜 책을 읽고 세미나 준비를 했는지. 남편이 잠든 후에도 왜 아내는 잠들지 않고 음악을 듣고 커피를 마셨는지.

나는 아내 옆에 아내와 같은 자세로 웅크리고 눕는다. 아내 몸이 따뜻하다. 나는 아내의 따뜻함 속으로 파고든다. “자기 방 가서 자요.” 아내가 나를 밀어낸다. 아내 밖으로 나는 주사위처럼 던져진다. 자주 나는 그 사실을 잊고 지내지만 아내는 독립적인 존재다. 그리고 독립적인 존재는 아름답다. 정치적으로나 미학적으로나.


부부의 일상을 소재로 『대한민국 유부남헌장』과 『남편생태보고서』책을 썼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에서 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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